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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하 Apr 25. 2023

처음 만난 이들이 건넨 위로

무해한 사람들 틈에서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였다. 사람들을 만나 밝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눴고, 북적이는 이들 틈에서 힘차게 움직였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언덕길에서 나는 줄곧 울음을 삼켰다. '여기서 울면 이상해 보일 거야. 참아야 돼.' 나름의 이성적인 사고를 곁들이며 감정을 억누르던 언덕길 위의 나는 그저 빠르게 발을 움직일 따름이었다. 그렇게 걷고 걸었다.

현관문이 등 뒤로 닫히면 그제야 나만의 시간이 되었다. 가방을 내려놓고 바닥에 머리를 대고 누워 멍하니 울었다. 어떤 때는 소리 내어 울었고, 어떤 때는 소리를 삼키며 울었다. 제어가 되지 않는 울음이 한참 흘러나온 뒤에야 감정을 다독일 수 있었다. 흐르는 눈물을 닦고 코를 풀고 다시 움직였다. 그렇게 우는 밤이 계속됐다.


그때의 나는 그런 시간을 통해 간신히 버텨나갔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날도, 친구와 신나게 술 한 잔을 기울이고 돌아온 날도, 아무렇지도 않은 평범한 날도. 밤이면 방 안으로 기어 들어와 한참을 울었다. '자취를 해서 다행이야. 이런 모습 아무한테도 보이지 않아도 되잖아.' 정신을 놓고 울 땐 언제고 나름 또다시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그런 밤들이 이어졌다. 아침이 오면 '그래 다시 힘내보자'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저녁이 다가오면 다시 겁이 났다. 혼자가 되어 밑바닥에 가라앉은 나를 마주하기가 점점 무서워졌다.


한참 울 때면 매번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누군가에게 연락해 마음을 털어놓고 이해받고 싶었다. 다독임을 받고 싶었다. 누군가 나를 건져 내주길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했다. 아니, 하지 않았다. 주변에 아무도 없던 것은 아니었다. 사랑하는 가족이 있었고 애정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아픈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이런 나를 이해받지 못할 거라고도 생각했다. (비록 그런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지만) '세상 사람들 다 힘들고 나도 힘드니 너도 힘내'라는 말을 들을 자신도 없었다.

무엇보다 나를 드러내면 버려질까 겁이 났다. 자기 연민에 빠진 나를 싫어하게 될까 봐, 힘든 이야기만 하며 이겨내지 못하는 내게 진절머리를 느낄까 봐 두려웠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 혼자가 됐다.




그날도 어김없이 울다 잠든 날이었다. 아침은 밝았고 부랴부랴 전주행 기차에 올랐다. 이전부터 머물고 싶던 숙소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신청한 이유에서였다. 하루종일 새가 지저귀고 대나무 숲을 마주하던 모악산 앞 숙소. 잔디밭에는 고양이가 뛰어놀던 그곳에는 네 개의 방이 있었다. 숙소에서는 한 가지 테마를 주제로 사람들이 모여 함께 시간을 보내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곤 했다. 이번에 내가 신청한 프로그램은 '워케이션'이라는 테마로 모인 네 사람이 2박 3일간 함께 지내는 프로그램이었다.

이런 상태로 가도 되는 걸까 걱정됐지만, 숙박비는 이미 지불했고 혼자 있던 밤이 두렵던 내게 별다른 선택권은 없었다. 기차에 앉아 우울증 자가검진, 조울증 자가검진을 검색창에 입력하며 전주로 향할 뿐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은 어렵지 않았다. 매번 그랬으니까. 웃으며 자기소개를 하고 수줍게 민들레를 따고 방에 짐을 풀었다. 5분 거리의 식당에서 청국장을 먹고 같이 누군가 가져온 짜이를 끓여 마시며 늦은 밤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직업을 이야기하고 일상을 이야기하다 주제는 '감정'이란 꽤 깊은 이야기로 넘어갔다.

1층 작은 방에 머물던 I는 그날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을 위해 '감정카드'라는 걸 들고 왔었다.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가 적힌 여러 장의 카드였는데, 감정을 시각화해 표현하기 어려운 마음도 직시하게 해주는 마법 같은 도구였다. 어쩜 비슷한 사람들만 모였는지, 감정카드를 하자는 제안에 모두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를 알아가기 아주 좋은 방법이라 모두가 생각한 까닭에서였다.


시종일관 분위기를 자연스레 풀어주던 I는 기획자의 특징을 발휘해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그날의 감정을 표현하는 카드 한 장 그리고 요 근래의 감정을 표현하는 카드를 두 장을 뽑아 돌아가며 이야기를 나눠보기로 했다.  

기쁨, 설렘 같은 긍정적인 감정 카드도 많았지만, 눈에 들어오는 건 어두운 감정의 단어가 적힌 카드들 뿐이었다. 어두운 감정 카드를 뽑는 날 보며 '전문 상담의를 만나지 왜 여기 있나' 생각하진 않을까 잠깐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상한 마음이었다. 오늘 처음 만난 세 사람에게 거짓된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간절한 마음이었던 것 같다. 나 좀 도와달라는 간절한 마음.


솔직한 마음을 담아 오늘의 감정카드로 '간절해' 카드를, 요 근래 느낀 마음으로 '슬퍼'과 '외로워' 카드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처음 만난 이들에게 이야기해버렸다. 내 세상이 무너진 그때의 이야기를, 일 년이란 시간이 지나도 전혀 해소되지 않은 원망을, 그렇게 내 안에 쌓여 나를 갉아먹는 외로움과 슬픔에 대해서. 멋쩍게 웃으며 이야기를 하다 그만 나는 울어 버렸다.

이야기가 끝나자 옆 방에 머무는 M은 내 손을 잡아 주었고, 1층 큰 방에 머무는 L은 울어도 괜찮다며 나를 다독였다. 그리고 I는 이야기했다.

이야기해줘서 고마워.
라고.


혼자만의 방에서 울며 그렇게 간절히 바랐던 마음들이 그곳에 있었다. 카드를 뽑기 전에 느꼈던 두려움은 멍청했다. 그들은 시종일관 다정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봐 주었고 간결한 단어 하나로 나를 보듬어 안아 주었다. 괜찮아, 힘내 라는 말 대신 그저 '고맙다'는 단어 하나. 판단하지도 추측하지도 않고 그저 순수하게 나를 바라봐주던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단어. 가장 단순하다 여긴 그 일상의 단어가 밑바닥에 있던 내 안의 짙은 외로움을 녹여 주었다. 그렇게 나를 구해주었다.




전주에서 돌아온 날 밤. 나는 울지 않았다. 울음을 참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들을 떠올리며 글을 써 내렸다. 무해한 사람들의 틈에서 건네어진 위로. 그 마음들이 여전히 내 안에 남아 나를 일으켜 세워준 덕분이다.

곧 그들을 만나러 다시 전주에 간다. 그날은 그때 하지 못한 인사를 꼭 전하고 싶다.

"친구들, 내 이야기 들어줘서 고마워."







bgm <우리의 슬픔이 마주칠 때> -'전진희'


알고 있지 내 마음 보이지 않아도
서로 닮은 그림자를 마주하고 있어
알 것 같아 고요한 호흡을 느낄 때면
깊은 강을 헤엄쳐 왔을 지친 너를 생각해


우리의 슬픔이 마주칠 때 그냥 웃어줄래
알고 있잖아 우리 우리 짙은 마음의 무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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