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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꽃봉 Feb 05. 2024

신발 길들이기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길

 내 키를 훌쩍 넘은 신발장은 질서 없는 신발들로 가득 차있다. 한 물건에 맛 들이면 마음 닿는 데까지 내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나는, 다음 신발을 정하기 전에는 좀처럼 신발장 문을 열 생각이 없다. 이번 오픈식은 산티아고 덕분이었다. 뿜어져 나오는 쾌쾌한 공기와 저마다 쓸모를 다 한 채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신발들을 보고 있자니 비루하나 내가 걸어온 세월의 전시장처럼 보였다. 이번에도 정리하긴 글렀지. 개중, 어디 오래 걷기 좋은 신발 없을까. 눈 씻고 찾아봐도 영 시원찮은 것들 뿐이다. 아무래도 새로운 또 하나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었던 게 분명하다.


 나의 발은 극단적 칼발이라 불린다. 내가 붙인 건 아니고 러닝에 푹 빠져있을 시절, 맞춤형 신발가게 직원의 소견이었다. 손 볼보다 발 볼이 더 좁은 특이한 내 발이 추천받은 브랜드는 아식*로, 이후 신발장엔 이 로고 신발이 많아졌다. 이번 산티아고 여행 신발도 망설임 없었다. 넉넉지 않은 통장을 생각해 제일 저렴하고 튼튼해 보이는 녀석으로다가 주문을 했다. 고작 한 달 남기고 어떻게든 길들이겠다는 포부에 주야장천 얘만 신고 다녔다. 출근길에도 집 앞 마트를 갈 때조차도. 그렇게 3주쯤 흘렀을까, 골반에 처음 느껴보는 통증이 왔다. 요가와 달리기에서 이유를 찾기엔 평소와 다를 게 없었고, 원인은 길들이고 있는 운동화 밖에 없으니 난감할 따름이었다.


 떠나기 사흘 전, 질 높은 여행을 위해 큰 결심을 내렸다. 믿고 있던 것에도 탈이 났으니 밑져야 본전. 내 운을 시험해 보기로 말이다. 내심 날 궁상이라 여기는 게 분명한 남편은 이왕 사는 김에 제대로 된 녀석으로 장만하라며 잔소리다. 이미 마음먹었으니 각오해라. 적극적으로 준영이의 손을 붙잡고 백화점 아웃도어 매장 여러 곳을 훑었다. 아무리 살펴봐도 거기서 거기 같고, 지식을 쌓을 여유도 없으니 제 값을 할 것 같은 비싼 등산화를 골랐다. 말 잘하는 사람을 멀리하는데도 불구하고 매번 화술에 넘어가고야 마는 나는 이번에도 예외는 아녔다. 말발 좋은 직원의 적극성에 감동해 신지도 않고 살뻔했으나 준영이가 급구 말려 신어는 봤다. 신발끈 매듭을 정성스레 묶어주는 직원분의 성의에 매장을 두어 바퀴 돈 후 카드를 꺼냈다.



 파리에서 생장으로. 새로 산 신발은 왜 인지 느낌이 좋았다. 이 고어텍스 하이킹 등산화로 말할 것 같으면 단단한 소재로 발 끝부터 발목까지 조여줘 잃어버린 내 길들도 흐트러짐 없이 잡아 줄 것만 같았다. 뿐이랴, 디자인과 컬러는 물론이요 한발 내디는 때마다 멋짐이 폭발할 것 같은 자신감까지 덤으로 생성시켜 줬다.

 생장에서 론세스바예스, 론세스바예스에서 수비리. 하루 이틀 걸으니 조금씩 몸에도 반응이 왔다. 온몸 구석구석 통증은 있는데 명확하게 어디라고 말은 안 나왔다. 뭐든 적응 기간이 필요하니까. 그저 이 길을 걷고 있는 나 자신이 대견해 아플수록 어떻게든 더 걸어내고 싶은 마음이 컸다.


 나갈 채비를 모두 마치면 재 빨리 신발을 신고 싶어졌다. 날마다의 시작에는 통증이 없으니 두근거리는 마음이 먼저다. 두어 시간을 걷고 나면 다시 아려오는 발목. 가만 보니 이 신발의 고역은 그토록 자부했던 단단함에 있었다. 너무도 튼튼해 발을 통제하고 있었고, 이리저리 유연 떨어야 하는 발등과 발목이 제 할 일을 못 해 걸음을 점점 더디게 만들고 있다. 함께 한 동행자들을 먼저 보내고 홀로 고군분투하며 내리막 길이 나오면 뒤로 걷기 시전을 하고 자갈 길이 나오면 덜컥 겁을 먹기 십상이었다.


알베르게 도착하면 먼저 하는 일과. 신발 벗기

 다행인 건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거짓말처럼 모든 통증은 사라진다는 거였다. 슬리퍼로 갈아 신는 순간 아픔은 잊혀지고 그날의 잔여물들을 씻어 낼 생각과 내일 걸을 길에 초점이 맞춰지기 때문에 내 고통은 '그나마' 아무것도 아닌 게 됐다. 비스무리한 고통과 치유로 하루하루를 보낸 여러 날들이 그렇게 흘렀다.


 통증이 일상이 되던 8일 차, 레온틴과 이별을 선언하고 마지막 길을 동행하던 날이다. 내 발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그녀는 앞으로 걸을 날들을 위해 새 신발을 사길 누누이 권유했었다. 앞에선 끄덕였지만 선뜻 행하지 못했던 이유는 내 계획에 없던 일이었고 좀 더 적응하면 나아질 거란 불확실한 희망 때문이었다.


 

 우린 오랜만에 큰 도시를 만나 아픈 것도 잊은 채 소녀들처럼 깔깔거리며 마을을 구경했다. 규모 있는 도시인만큼 재밌는 구경거리도 많았는데 매의 눈 레온틴이 아웃도어 매장을 발견했다. 그녀의 손에 이끌려 들어간 스포츠 가게는 눈이 돌아갈만한 등산용품이 가득했다. 나도 모르게 진열되어 있는 트레킹화 앞으로 가 섰다. 제일 군더더기 없어 보이는 샌들로 된 트레킹화를 신어봤다. 웃기게도 이곳이 지상낙원이다. 처음으로 신고 있는 저 비싼 신발을 버리고 싶다 생각했다. 한국에서 신발을 사기 위해 애쓴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며 고집부린 나 자신이 정말 바보 같이 느껴졌다. 길들이기는 실패였다. 무려 3배나 저렴한 트레킹 샌들이 이리도 군더더기 없이 잘 맞다니. 곧장 신발을 갈아 신고 1kg나 되는 골머리 등산화를 배낭에 매단 채 레온틴과 같은 곳을 향해 걸었다.


왼쪽: 고어텍스 40만 원 등산화 / 오른쪽: 15만 원 트래킹 샌들


 이후 여행의 질은 말할 것도 없이 좋아졌다. 걷는 내내 발에 갇혀있던 신경들은 사라지고 주위를 더 자유롭게 만끽할 기회가 주어졌다. 많은 의미를 부여하자면 더 솔직하게 울고 웃게 됐다. 생각해 보니 적응기간이라는 정신승리를 빙자해 몸을 혹사시키고 있었을뿐더러 비싼 값을 보상받으려는 오기가 발동했었지 싶다. 한마디로 잘못된 선택을 인정할 용기를 내지 못했던 거였다.


새 신발 신고 처음 걷는 길. 정말 신났다


 정해진 걸 죽도록 싫어하는 난, 반대로 '정해져야' 마음이 제일 편했다. 멋대로 마음먹어버리고는 맞든 맞지 않든 내 것 인 것‘처럼' 보이려 부단한 노력을 가담하곤 했는데 멀리서 보니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언젠가 탈 날 걸 알면서도 버리지 못하는 이 못난 자의식을 어찌 보듬어줘야 할까. 머리에 떠오른 방법은 역시나 일단 해보는 거다. 지르고 후회하는 굴레를 후회 없이 즐기며 나에게 맞는 것들을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 길들이려 해도 길들여지지 않는 것도 결국 해봐야 알 수 있는 거니까. 왜인지 모르게 실패의 경험이 더 재밌고 귀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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