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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시야간숙소 Jan 19. 2022

50년 시차의 고려 국왕 시호 수여를 둘러싼 시대 변화

<달콤살벌한 한중관계사>를 읽고

** 만인만색연구자네트워크에서 낸 <달콤살벌한 한중관계사>의 ‘제국의 파도 앞에 선 고려의 국왕’을 읽고 정리한 내용입니다.




시호는 왕이나 사대부들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찬양하여 추증한 호를 말하는데 이는 왕이 죽은 뒤 종묘에 신위를 모실 때 붙이는 묘호와는 다른 것이다. 예컨대 조선 세종의 시호는 '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이고, 세종은 묘호이다. 흔히 원 간섭기라 불리는 고려 후기에 등장하는 ‘충’으로 시작되는 왕들의 ‘충렬’, ‘충선’과 같은 것이 바로 시호이다. 고려 시대 묘호는 고려 후기 제후국(황제의 신하)의 위상이 정립되면서 사라짐에 따라 충렬왕 바로 전대 왕인 원종까지 존재했고 그 이후로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는 없었다. 고려 시대 묘호와 시호, 그리고 이를 추증한 주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태조 ~ 강종 : 묘호(by 고려), 시호(by 고려)

2) 고종 ~ 원종 : 묘호(by 고려), 시호(by 고려), 시호(by 원나라)

3) 충렬왕 ~ 충정왕 : 시호(by 고려, 충정왕 제외), 시호(by 원나라)

4) 공민왕 : 시호(by 고려), 시호(by 명나라)

5) 우왕 ~ 창왕 : X

6) 공양왕 : 시호(by 조선)     


여기서 인상 깊은 부분은 3)과 관련한 것이다. <고려사> 충렬왕 34년을 보면, “충선왕 2년(1310), 원나라에서 충렬이라는 시호를 내려주었으며, 공민왕 6년(1357)에는 경효를 덧붙였다.”라고 되어 있고, 원나라에서 시호를 추증하기 시작한 때가 충선왕 재위 시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충선왕은 신하들이 충렬왕에 대한 시호를 올리려고 하자 “엄연히 상국이 있으니 나로서는 그저 시호를 요청해야 할 따름이다.”라면서 허락하지 않았고, 원에 표문을 올려 충렬왕과 더불어 고종과 원종의 추증도 요청하였다. 즉, 원의 시호 수여는 고려의 자발적 요청에 따른 결과였던 것이다. 이후 고려는 독자적인 시호를 올리지 않기 시작했고, 원의 시호 수여는 충숙왕까지 계속되었다.


<고려사 세가 충선왕 2년(1310)>
당초 우리나라에서는 비록 송·요·금나라의 제도를 따르긴 했으나 역대왕의 시호는 모두 종자를 붙여 정했다. 그러나 원나라를 섬긴 이후로는 명분이 더욱 엄해졌는데, 옛날 한나라의 제후들이 모두 한나라로부터 시호를 받았으므로 왕이 표문을 올려 죽은 선왕의 존호를 요청하고 또 고종과 원종의 추시도 요청하니 이에 따라 원나라에서 조서를 내린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이 충숙왕 이후부터 달라지는데 주목할 지점은 충숙왕 이후 충혜왕, 충목왕, 충정왕에 대한 원의 시호 수여의 방식과 시기이다. <고려사> 충목왕 4년을 보면, “공민왕 6년(1357) 윤9월 계해일에 현효대왕이라는 시호를 올렸으며 16년(1367) 정월 정해일에 원나라에서 충목이라는 시호를 내렸다.”라고 되어 있다. <고려사>를 보면 앞서 충렬왕의 경우 원의 시호가 먼저 있고, 이후 공민왕 시기에 시호가 덧붙었었는데 충목왕의 경우에는 고려의 독자적 시호가 먼저 있고 그 이후에 원의 시호가 덧붙여진 것이다. 즉, 충선왕 재위 시기부터 독자적 시호를 올리지 않았던 고려에서 공민왕 시기 독자적인 시호를 올렸다는 것이고 이때 시호는 <고려사> 충렬왕 34년에서 볼 수 있듯이 고려에서 독자적인 시호를 올리지 않았던 모든 왕(충렬왕 ~ 충목왕(충정왕 제외))에게 올린 것이었다.


<고려사 세가 공민왕 6년(1357)>
충렬왕(忠烈王)·충선왕(忠宣王)·충숙왕(忠肅王)·충혜왕(忠惠王)·충목왕(忠穆王)에게 각각 존호를 덧붙여 올렸다.     


그런데 공민왕 시기 이미 고려에서 독자적 시호를 올린 상황에서 10년 후 원에서 갑자기 충혜왕, 충목왕, 충정왕을 함께 묶어서 한꺼번에 시호를 수여했다.    

 

<고려사 세가 공민왕 16년(1367)>
원나라에서 전 요양이문 쿠두테무르를 보내 영릉(충혜왕)에게는 터성선충숭인병덕협공인량공신의 칭호와 충혜라는 시호를, 명릉(충목왕)에게는 협성보리연덕선혜봉화보경공신의 칭호와 충목이라는 시호를, 총릉(충정왕)에는 수성이정좌리익순보의적경공신의 칭호와 충정이라는 시호를 각각 추서했다. 


즉, 이 시기 원의 시호 수여는 충선왕 시기(14세기 초 시점)와 같이 고려의 자발적 요청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고려의 요청이 없었음에도(이미 고려는 독자적 시호를 올림) 원에 의해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더니 50년이면 국가 간의 위상이 변하는 것일까? 언제는 요청해서 얻을 수 있었던 것을, 이제는 요청하지 않았는데도 얻게 된 것은 무슨 의미일까? 50년 시차를 둔 고려 국왕 시호 수여의 변화는 시대 변화를 의미했다. 원 제국이 강성했던 14세기 중반까지는 원으로부터 시호를 받음으로써(즉, 원 황실에게 공덕을 인정받음으로써) 고려 왕실의 위상을 높일 수 있었으나 원명 교체기인 14세기 중후반에 이르면 그것은 무의미해졌고, 오히려 원의 ‘구조 요청’(자발적 시호 수여를 통한 지지 요청)의 의미로만 남게 된 것이다. 결국 원은 충혜왕, 충목왕, 충정왕에게 한꺼번에 시호를 수여하고 1년 후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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