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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Jan 29. 2024

너를 인정해, 또 나를 인정해

- 뮤지컬 [키키의 경계성 인격장애 다이어리]

뮤지컬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경계성 인격장애’라는 병명을 검색했다. 특정한 질병에 대해 뮤지컬까지 만들어 고찰할 필요가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긴 것이다.


인터넷에 따르면 ‘경계성 인격장애’란 성격장애의 일종으로 정서, 행동, 대인관계 등에서 극히 변덕스럽고 예측이 불가능한 상태를 말한다. 허무와 상실감을 많이 느끼며 감정 기복이 심할 때는 자제력이 없어지고 자기 파괴적이 되어 자해를 하거나 극단적으로는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누군가에게 버림받는 것, 외로워질 것에 대해 극도의 불안을 느껴 상대에게 집착하거나 과도한 분노를 표출하기도 한다. 과식, 과소비, 마약, 음주와 같은 자기 파괴 행동도 이들의 패턴이다.


우리나라에서 ‘경계성 인격장애’로 유병률은 0.5 – 2.5%. 하지만 다른 국가의 유병률이 2.7-5.9%인 것을 감안하면 사회적인 시선 등을 의식해 병원을 찾지 않는 숫자가, 그러니까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도움조차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을 수 있다는 말이다. [키키의 경계성 인격장애 다이어리]가 공연된 공간의 객석이 200석 정도였으니 관객 중 4명 이상은 이 증상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분홍과 초록색의 대비가 돋보이는 단순한 무대다. 무대 뒤 단상 위쪽으로 연주팀이 자리하고 있고, 그 뒤로 자막을 띄울 수 있는 화면이 보인다. 불이 켜지면 다섯 명의 호스트가 무대로 나온다. 그들은 앞으로 등장할 게스트를 도와 토크쇼를 만들어갈 것이다. 등장인물이면 인물, 동물이면 동물, 컴퓨터와 차 같은 사물이라면 또 사물이 되어 게스트의 이야기가 관객에게 전달되도록 만들 것이다.


마지막에 등장한 인물은 키키. 경계성 인격 장애를 가진 키키는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고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던 5년 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질병을 앓고 있는 인간의 분투기’는 즐거운 뮤지컬을 기대하는 관객들이 선뜻 선택하기에는 쉽지 않은 주제다. 어쩐지 재미없고 지루하고 처절한 내용일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키키의 경계성 인격 장애 다이어리]는 사뭇 다르다. 관객의 선입견을 이해한다는 듯 5명의 호스트는 그야말로 몸을 던지며 극의 흥미를 올리고 재미를 준다.



원작도, 시놉시스도 보지 않고 객석에 앉았은 터라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자못 궁금했다. 어색하게 관객 앞에서 이야기를 시작한 키키는 호스트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과거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상처 때문에 고통받고 어떻게든 극복하려 몸부림치는 과정에서 자신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상처를 줬다.

그런 키키의 이야기가 완전히 낯설지는 않다.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혼자 남을 것이 두려워 눈물을 흘려본 적도 있고, 실수를 할까 봐 심장이 몸 밖으로 튀어나올 듯한 느낌을 품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너의 정당성을 인정해.
너의 고통을 인정해.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고 상담을 받으며 키키는 이렇게 노래한다.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런 고통을 안고 사는 사람임을 인정하고 받아달라는 말이다. 경계성 인격장애를 앓고 있는 키키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이지만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말일 수 있다. 내가 살아 있는 그 자체로 정당성을 인정받고, 내가 느끼는 고통이 가치 있다는 것을 이해받는 것만큼 타인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이 뮤지컬에는 여러 장르의 노래가 들어 있다. 사랑을 나눌 때의 달달한 발라드와 폭주하는 감정상태를 외치는 헤비메탈, 거기다 랩도 있다. 환갑이 넘은 남경주 배우가 멋지게 랩을 끝낼 때엔 환호성이 튀어나왔다. 이 배우님, 몸을 사릴 줄을 모른다.


호스트를 맡은 남경주 배우뿐 아니라 바람둥이에서 상담사까지 변신한 문지수 배우와 다시 보게 만든 목소리의 이민규 배우, 무대를 날아다닌 신진경 배우와 귀여운 고양이가 되어 버린 전성혜 배우도 최고였다. 1인이 네댓 개의 역할을 맡아 눈부신 무대를 보여주었다. 물론 키키 역의 이휘종 배우는 이번에도 옳았다.  


배우들이 공연 중간 중간 연주팀을 방문하기도 한다. 기타를 치던 손으로 멋지게 스시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작은 무대여서 가능한 시도들이지만 언제봐도 흥미진진하다.




CKL스테이지는 처음 방문한 공연장인데 좌석 선택에 신중을 기해야 할 듯하다. 낮은 무대와 단차 적은 객석의 조합인 탓에 앞사람 앉은키가 클 경우 시야에 상당한 장애가 생긴다. 앞 좌석에 앉은 분을 잘못 만나 무대의 1/5은 못 보고 나온 것 같다. 원형으로 올린 무대 덕에 가운데에서 노래하는 배우는 확실하게 볼 수 있었지만 앙상블로 노래할 때는 아쉬움이 남았다.


5년의 시간을 지낸 키키가 그래서 완벽한 행복에 도달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나처럼, 혹은 당신처럼 아직도 키키는 분투하고 노력하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제 키키와 같은 사람이 주위에 있다면 조금은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도 같다. 키키에게 합당한 조언은 우리에게도 들어맞는 충고다. 나를 그리고 당신을 인정한다. 이 뮤지컬은 2월 25일까지 CKL 스테이지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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