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에는 바이크로 추정되는 탈 것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무대 뒤쪽 위로 작은 모니터가 하나. 등장인물의 이름이나 시간, 배경 등 설명이 필요한 부분에 감초처럼 등장할 예정이다. 불이 켜지면 바이크에 기대 책을 읽는 남자가 보인다. 허리 굽은 노인이 등장하자 읽던 책을 덮고 노인을 바이크 뒤에 태운다.
잠시 후 암전. 다시 불이 켜지면 무대 위 바이크에는 이제 두 명의 젊은이가 타고 있다. 모니터에는 경우, 수창, 1952년, 이카이노 같은 단어들이 지나간다.
1952년 오사카의 이카이노는 일제 강점기와 4.3 사건이 휘몰아친 제주를 등지고 떠나온 한국인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6.25 전쟁이 한창인 한반도를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은 일본 사회에 섞이지도 녹아들지도 못했다. 이들의 공식 신분은 ‘재일 조선인’. 일본에 거주하는 외국인이기는 하나 ‘조선’이라는 나라가 이미 망해버렸으니 사실상 이들은 무국적자다. 이들에게는 여권을 발급해 줄 나라도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싸워줄 국가도 없다. 재일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의 차별을 받으며 어렵게 삶을 이어간다. 얼핏 들어도 무거운 이야기다.
바이크 위의 두 젊은이 경우와 수창은 재일 조선인이다. 철을 훔쳐 오늘의 끼니를 마련한다. 그들은 열면 안 되는 곳에 가게를 열고, 팔면 안 되는 물건을 판다. 말하자면 요주의 인물들이다. 일본 경찰인 쿠마타와 노기자카가 이들을 주시하고 있다.
이제 막 등장한 경우와 수창을 쿠마타와 노기자카가 뒤쫓는다. 무대 한가운데 고정된 바이크에 올라탄 두 젊은이를 형사들 역시 바이크를 타고 추격한다(어떻게?). 길에서 마주친 이들은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린다(이건 좀 더 상상하기 쉽다). 좁은 무대 위에서 이들의 박진감 넘치는 추격전이 유머러스하게 펼쳐진다. 이 추격전은 1950년대부터 이어지는 재일 조선인들의 무거운 역사를 어떤 방식으로 풀어갈 것인 것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선언 같다. 유쾌하게, 유머러스하게, 그리고 담백하게 만들 것이다. 이미 첫 추격전부터 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졌다.
이 연극은 1952년에 시작하여 현재에 이른다. 전반부의 주인공이 둘도 없는 친구 사이인 경우와 수창이라면, 후반부는 경우의 아들인 명기가 이야기를 끌고 간다. 오늘의 한국에 살고 있는 관객들에게 70년 전 일본, 그것도 재일 조선인의 이야기가 낯설 것이 걱정됐는지 극장 초입부터 ‘재일 조선인’, ‘재일동포 북송사업’, 스이타 사건’ 등 연극의 배경에 관련된 지식들을 자세하게 설명한 포스터를 붙여 놓았다. 조금 일찍 도착해 한번쯤 포스터를 읽고 입장하길 권한다.
이 연극은 2021년 짧게 초연된 이후 이번이 세 번째 무대다. 2022년 무대는 어떻게 해도 시간이 맞지 않아 아쉽게도 관람하지 못했다.
2022년이라면 일본의 또 다른 재일 조선인인 양영희 감독의 [수프와 이데올로기]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개봉한 해이기도 하다. 3남 1녀 중 막내인 양영희 감독의 오빠 셋은 이 연극에도 등장하는 ‘재일동포 북송사업’의 일환으로 모두 북한으로 건너갔고 불행해졌다. 나이차이가 꽤 나는 늦둥이였던 양영희 감독만 북한으로 보내지는 화를 면했다. 이들의 불행한 가족사는 [카메라를 끄고 씁니다]라는 에세이로도 나와 있다. 어둡고 불행한 이야기가 이어질 것 같지만 영화도 에세이도 즐겁고 유쾌하다. 마치 이 연극 [이카이노 바이크]처럼. 어쩌면 재일 조선인들은 유쾌함, 긍정적 에너지로 그 힘든 시간들을 견딘 것은 아닐까.
2022년의 기억들 덕분에 2024년의 연극 [이카이노 바이크]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굳이 사전 지식이 없더라도 이 연극은 충분히 즐겁게 관람할 수 있다. 이 연극은 좁은 무대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교과서 같다. 한정된 자원을 최대한 사용해 표현하는 최고의 무대다. 배우들의 계산되고 과장된 몸짓들에 관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진다. 분명 어둡고 슬픈 이야기이지만, 그래서 눈가가 촉촉해지려고 할 즈음 어김없이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경우와 수창이 등장하기 전 등장했던 젊은이와 할아버지의 정체가 극 후반 비로소 밝혀지며 구성적으로도 탄탄하게 완결된다. 원작이 따로 있는 작품이지만 이런 경우 연출가에게 박수를 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변영진 연출가 멋지다.
극의 전반부를 이끌고 가는 경우 역의 문성일 배우와 수창 역의 정명군 배우는 시종일관 즐겁게 달리고 달리고 달린다. 이들의 젊은 에너지 때문에 아픈 현실이 더 남루해 보였다. 경우와 경우의 아들 명기까지 쫓아다니는 쿠마타 형사 역의 장태민 배우의 연기는 입을 벌린 채 지켜보았다. 스이타 조차장에서의 연기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방점을 찍을 줄 아는 배우다. 미래 역의 김계림 배우는 웃음 버튼이었다. 귀여운 미래를 바라보며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귀엽지?’라는 생각을 하다 쿠마타 형사에게 계속 머리를 가격 당하는 태진 역의 최경식 배우를 보고는 걱정이 들었다. 저기, 머리, 괜찮으시죠?
90분 동안 웃을 수 있는 연극이지만 이 작품이 던지는 질문은 소소하지 않다. 일본 사회의 밑바닥을 구성하며 고생하던 경우는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다. 경우의 머리카락이 새하얗게 변했듯 이제 세상은 경우를 지나 명기의 시간이 되었다. 고통 속에서도 이렇게 삶은 이어진다.
국경이라는 게 원래 있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아니더라고요. 그렇게 배워서 국경이 있는 것이더라고요.
휴전선을 향하며 명기는 이렇게 말한다. 일본, 재일 조선인, 외국인 혐오 같은 부정적인 것들을 사라지게 하기 위해서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하는지 이제 명기는 확실히 이해한 것 같다. 고향이란 어떤 곳일까? 태어난 곳? 내 여권에 새겨진 국가명? 이런 평소에는 쉽게 하기 힘든 생각들을 한 번쯤 정리하게 만들어 준 좋은 연극이다. 3월 10일까지 씨어터쿰에서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