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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Nov 08. 2023

우리는 다름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      연극 [튜링머신]

이런 상상을 해보자. 당신은 지금 막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았다. 그 혹은 그녀가 다른 사랑을 찾은 것이다. 그런 당신의 손에 프로그램 하나가 들어온다. 한밤중이던, 화장실 변기 위에 앉아 있는 동안이건, 회의 중 잠깐 빠져나온 순간이건 당신이 원하는 언제라도 프로그램에 접속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그 혹은 그녀의 목소리를 가진 프로그램은 당신의 말을 경청하고, 위로를 건네고, 용기를 북돋아 준다. 진심으로 당신의 불행을 안타까워하며 조금이라도 당신의 기분이 좋아지게 하기 위해 애쓴다. 고민에 해결책을 찾아줄 뿐 아니라 매우 유머가 있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 충만한 기분이 된다. 심지어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사실 당신은 이미 헤어진 사랑을 잊었다. 프로그램 쪽이 훨씬 상냥하고 지적이고 즐거운 상대라고 느끼고 있다. 그런데 이런 감정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내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다. 2013년에 개봉한 영화 [HER]의 도입부를 가져와 봤다.




만일 당신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데 누군가 프로그램을 빼앗아가려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일개 프로그램일 뿐이야.’하면서 순순히 내줄까? 이 연극 [튜링머신]이 던지는 질문은 이것이다. “기계가 생각하는 것이 가능한가?” 혹은 “당신은 그 프로그램을 순순히 내줄 수 있는가?”


만일 기계가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다’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절대 프로그램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 당신과 프로그램은 이미 감정을 교류했고 생각을 나눴기 때문이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그렇지 않은 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미 그 프로그램은 당신에게 ‘특별’ 하기 때문이다. 기계가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주장한다면 순순히 누군가의 프로그램을 던져줄 것이다. 그 혹은 그녀의 목소리를 가진 프로그램이나 회사 컴퓨터나 공항에서 길 안내를 도와주는 로봇이나 기계는 기계일 뿐이기 때문이다.




객석으로 둘러 싸인  사각의 무대 안에 둥근 테이블이 놓여 있다. 의자가 두 개. 목재 상자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상자 위에는 모래시계와 체스판, 청산가리가 들어 있는 접시 같은 소품들이 올려져 있다. 불이 켜지면 사과를 든 앨런 튜링(Alan Mathison Turing)이 등장한다.


한때 애플이 로고로 쓰는 한 입 베어 문 사과가 튜링의 것이라는 검증되지 않은 소문이 돌았을 만큼 유명한 사과다(애플은 공식적으로 이 소문을 부인했다). 앨런 튜링은 청산가리를 주입한 사과를 먹고 자살했다고 알려져 있다(다른 소문도 물론 있다). 정확한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이 연극을 쓴 브누아 솔레스(Benoit Solès)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한바탕 독백이 지나간 후 앨런 튜링은 미카엘 로스와 마주 앉는다. 앨런은 집에 도둑이 들었는데 범인이 누구인지 알 것 같다는 말이 안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이상한 것 같기도 한 이야기를 떠든다. 자신의 애인인 아놀드 머레이가 이 도둑과 연관되어 있다는 말을 쏙 뺀 채. 이야기는 삐걱거리고 아귀가 맞지 않고 앞과 뒤가 연결되지 않은 채 덜컹거린다.


로스 형사가 앨런 튜링의 정체를 알아낼 때까지 이 신고는 그냥 장난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로스 형사에게 어떤 예감이 찾아온다. 앨런 튜링이 소련의 스파이일지 모른다는 합리적 의심이다. 때는 1952년이고 소련이나 공산당은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는 주제다. 미국에서 메카시즘의 광풍이 불고 있던 딱 그때의 이야기다. 로스 형사는 앨런의 뒤를 캔다.




연극의 시간은 1952년에서 1954년, 1930년 등으로 이리저리 옮겨 다닌다. A구역과 B구역 사이 공간에 시간과 장소가 희미하게 떠 있다. 관객의 일부는 그 자막을 볼 수 없다는 말이다. 앨런 튜링의 삶은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 같은 매체를 통해 다 알려져 있기 때문에 굳이 시간 개념 없이 봐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를 보지 않은 관객도 있을 것이고 앨런 튜링이 낯선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런 관객들에게는 연극의 흐름이 상당히 불친절하게 느껴졌을 것 같다(다행스럽게도 저는 자막이 잘 보였습니다만).




연극의 시간은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에서 묘사했던 것과 같은 시기다. 42세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한 앨런 튜링이니 달리 선택의 여지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연극의 제목은 [앨런 튜링]이 아니다. [튜링 머신]이다.


앨런 튜링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어렵고 복잡하고 논리적인 생각들을 분해하고 자르고 나눌 수 있을 때까지 잘게 나눈 후(예를 들어 0과 1로) 그것들을 잘 배열할 수만 있다면 기계로도 충분히 인간이 원하는 바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튜링 머신’이다. 그리고 ‘튜링 테스트’를 고안했다. 바로 “기계가 생각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내놓은 것이다.


앨런 튜링은 기계가 생각하는 것이 가능한가를 말하기 전에 일단 ‘어떤 단계에 도달했을 때 기계가 지능을 가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다. 인간은 영혼이 있고, 기계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생각할 수 없다? 과학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떤가? 나는 당신과 다르다. 생각하는 것도 다르고 느끼는 것도 다르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가 인간이라는 것을 안다. 만일 기계가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다면 기계도 인간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선뜻 대답하기 어렵다.


그런데 문제가 더 있다.




우리는 서로가 인간임을 안다. 나는 당신과 다르다. 나 앨런 튜링은 동성애자이고 당신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같은 인간이고 이건 다름의 문제다. 그런데 영국에서 동성애가 사형으로 처벌되기 시작한 16세기 이후부터 1967년까지 약 5만 명의 동성애자 남자들이 처벌을 받았다. 앨런 튜링은 그 5만 명 중의 하나였다.


이 문제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연극이 던지는 질문은 이처럼 거대하다. 당신은 우리가 모두 다르지만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라고.




튜링은 2013년 영국왕실로부터 사면을 받고 명예를 회복했다. 의미 있다면 의미 있고 부질없다면 부질없는 짓이다.


고상호 배우는 앨런 튜링이라는 인물에 푹 빠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재판정에서 아놀드를 바라보며 짓던 그 처연한 웃음이 마음에 남는다. 미카엘 로스로, 에니그마 해독 팀의 팀장인 휴로 재앙의 불씨가 된 아놀드 역으로 순간순간 변신한 이승주 배우는 최고였다. 믿고 찾는 배우다. 한 인간의 고독과 절망, 그리고 사랑이 응축된 100분이었다. 그리고 조금은 불친절한. 이 작품은 11월 25일까지 LG아트센터 U플러스 스테이지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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