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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Feb 19. 2024

우리는 모두 섬과 같아……

- 연극 [비 BEA] (스포 약간 있습니다)

무대가 환해지면 침대에 누워 있던 베아트리체(Beatrice)가 일어나 춤을 춘다. 온몸을 사용해 리듬을 타고 침대 상태가 걱정될 정도로 격정적으로 몸을 흔든다. 그녀의 표정은 환하다 못해 순수하고 무념무상인 듯하다.


이름을 그대로 호명하는 우리의 습관과 달리 풀네임을 줄여서 말하기를 좋아하는 나라에 살고 있는 베아트리체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비(BEA)’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여기서 한번 더 기술이 들어간다. 베아트리체와 가장 가까운, 그래서 애칭을 마음대로 사용해도 문제가 생기지 않는 엄마는 그녀를 비(BEA)라는 음과 비슷하게 발음되는 꿀벌(BEE), 한걸음 더 나아가 벌이 날아다니는 모습을 표현한 ‘붕붕이’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주인공 이름 하나를 이해하는데 이만큼 공력을 들여야 한다면 연극 전체를 과연 다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극 초반부터 찾아왔다.




침대가 무너질 정도로 춤을 추는 모습으로 등장했지만 사실 비는 몸을 움직일 수 없다. “정확한 병명도 모른 채 만성 체력 저하증으로 8년째 침대 생활을 하고 있는 비”라고 시놉시스에 적어 놨기 때문에 이 정도를 밝히는 것이 스포가 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니까 침대 위에서 춤을 추고 있는 베아트리체의 모습은 실상 밖으로 표현되지 않는 내면의 상태다. ‘베아트리체’는 또 어떤 이름인가. [신곡]에서 단테를 천국으로 이끌어준 여성이다. 영원한 사랑과 순수하고 고결한 여성의 상징이다. 그러니까 어눌한 발음으로 겨우 의사소통이 가능한 상태로 누워있는 베아트리체의 내면은 순수하고 고결하며 활기 있고 생명력이 가득하다는 말이다.




그런 비를 간호하기 위해 레이가 찾아온다. 시놉시스에는 “남들보다 몹시 뛰어난 공감 능력으로 유일하게 비(Bea)를 이해하는 간병인”이라고 되어 있다. 그래서 비와 레이의 대화는 관객들도 다 알아들을 수 있다. 실상은 또렷하지 않은 발음을 웅얼거리는 비의 말을 레이가 100%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레이의 본명은 레이먼드(Raymond). 비는 레이먼드의 이름을 가지고 장난을 친다.


비 : 레이 알렉산더. 대왕! The Great! -
레이 : 내가 Great였으면 좋았게? 나는 그냥 OK. 정도에 가깝지.
비 : OK. 레이. 레이 알렉산더. The Great 가 아닌, OK.


하지만 남주인공의 이름이 Ray가 되어야 했던 이유는 알렉산더 대왕 때문이라가 보다는 마돈나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극 전반에 걸쳐 마돈나(Madonna)의 “Ray of light”가 흘러나온다. 그러니까 레이는 비에게는 ‘한줄기 빛’과 같은 존재인 것이다.


이 정도쯤 되면 이 연극을 영미권 이외의 나라에서 무대에 올릴 때에는 뭔가 다른 조치가 필요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돈나의 Ray of light는 1998년에 발표된 노래다. 2010년 믹 고든(Mick Gordon)이 이 작품을 썼을 때는 모두 알고 있는 노래였을 수 있지만 지금은 2024년이다. 1998년에는 태어나지도 않았을 관객이 절반쯤은 된다.




아무튼 시놉시스에는 없지만 스포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한발 더 나가보자면, 비는 엄마인 캐서린에게 편지를 쓴다. 8년 동안 침대 생활을 했고, 손가락조차 움직일 수 없으며, 말도 제대로 할 수 없고 덧붙여 좋아질 가능성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자신이 죽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편지다. 존엄사를 부탁하는 것이다. 이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결론에 도달하는 지를 연극은 그다지 어둡지 않고 명확하게 보여준다.


아마도 공감에는 한계가 있는 것 같아.


비는 직접 겪어보기 전에는 타인을 공감할 수 없었음을 뼈저리게 느끼며 이렇게 고백한다. 엄마에게 자신의 상태와 마음을 공감해 달라는 호소다. 아픈 딸과 엄마에게 필요한 대화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우리 모두가 알아야 할 내용인 것은 아닌지. 타인들과의 관계에서 ‘공감’할 수 없다면 우리는 제대로 된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자폐를 마음 맹인이라고 불러

자폐인인 자신의 누나에 대해 설명하며 레이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어느 정도 마음 맹인이 아니냐고 묻는다.




120분의 시간 동안 이 연극이 다루는 주제가 결코 가볍지는 않다. 일단 죽음은 가벼운 소재가 아니다. 더군다나 다른 사람의 목숨을 거두는 ‘존엄사’의 문제는 무거울 수밖에 없다. 게다가 사람들과의 관계에 관한 문제라면 더 폭넓은 생각을 요구한다. 이 무거운 주제들을 비교적 밝고 경쾌하게 풀어낸다. 온몸을 움직일 수 없는 비가 춤을 추고 있으니 분위기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픈 비를 연기한 김주연 배우는 활기차고 매력 있었다. 하지만 문득 ‘비가 아니라 템플 같아.'(김주연 배우는 [템플]이라는 연극에서 자폐인인 주인공 템플을 연기했습니다)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아마도 가끔 부정확한 발음을 보여줘야 했던 탓에 그렇게 느껴진 것 같다. 김세환 배우는 어쩐지 어눌하지만 공감력 많은 레이를 잘 보여주었다. 저 많은 대사를 외웠다는 것에 먼저 박수를 보내고 싶다. 차갑고 외로운 캐서린을 보여준 강명주 배우에게도 박수를 보낸다. 마지막 결정 후 춤추는 비 뒤에서 울부짖는 캐서린의 모습은 다른 설명이 필요 없었다.


배우들의 열연에도 불구하고 이 연극이 100% 관객에게 전달될지는 미지수다. 훌륭한 주제와 표현 방법인 것은 인정하지만 어쩐지 절반 정도는 이해 못 한 채 흘러갈 수도 있겠다는 걱정이 든다. 이 부분은 아마 연출의 책임이 아닐는지. 존엄사나 인간관계, 그러니까 인간에 대한 문제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연극 [비]는 3월 24일까지 엘지아트센터 유플러스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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