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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Mar 01. 2024

우리 다시 시작해 보자

- 연극 [아트]

무대는 세르주 혹은 마크, 그도 아니면 이반의 거실이다. 무대 중앙에는 3명이 넉넉하게 앉을 수 있는 푹신한 소파가 놓여 있다. 관객은 장면에 따라 누구의 공간인지 금방 알아챌 수 있다.


세르주의 거실로 마크가 찾아오면서 연극은 시작된다. 세르주는 최근에 구입한 150X120짜리 흰 캠버스에 흰 줄이 그려져 있는 앙트로와의 그림을 마크에게 보여준다. 흰 캠버스에 흰 줄이 그려져 있다니 보일 리가 없다. 그림에 대해 언쟁하던 마크는 친구 이반을 찾아가 하소연한다.

그림이 5억이라고? 이 집이 3억인데?

곧 결혼을 앞둔 이반이 놀라며 묻는다. 잘 나가는 피부과 의사인 세르주와 항공 엔지니어인 마크, 문구업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한 이반은 각각 직업도. 수입도, 상황도 다르지만 25년 동안 굳건한 우정을 유지해 왔다. 하지만 앙트로와의 그림 앞에서 친구들의 대화는 점점 거칠어지기 시작한다. 이들의 우정은 과연 계속될 수 있을까?




이 작품은 프랑스의 극작가 야스미나 레자(Yasmina Reza)가 1994년 발표했다. 우리나라에서는 2003년 이후 꾸준히 무대에 올려지는 작품이다. 30년 전 작품이지만 오래된 느낌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작품은 ‘우정’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변하고 그림의 유행도 달라지지만 인간관계란 항상 문제이고 관심의 근원이다. 게다가 25년 된 우정이라니 흥미진진할 수밖에. 그러니 이 연극의 제목이 [아트]이고 무대 중앙에는 앙트로와의 거대한 그림이 놓여 있지만 관객은 세 사람의 말에, 우정에, 관계에 집중해야 한다.


이들은 서로 대화를 나누기도 하지만 돌아서서 관객을 향해 긴 방백을 던지기도 한다. 그 방백 속에 이들의 속마음이 숨겨져 있다. 마치 우리가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다양한 감정을 느끼는 것처럼 세르주와 마크 그리고 이반의 마음이 관객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난 저 자식 웃는 소리가 정말 싫습니다.


세르주가 관객을 향해 소리친다. 웃고 있는 친구를 보며 ‘정말 싫다’고 속으로 중얼거린 적이 한 번이라도 있는 관객이라면 세르주를 격하게 이해할 수 있다. 등장인물들은 이런 식으로 각자의 마음을 관객에게 고백하면서 또 다른 말들을 앞세워 대화를 한다. 일상의 우리처럼.




시놉시스에 소개된 사건 외에(그러니까 세르주가 앙트로와의 그림을 산 사건 외에) 특별한 사건이라고는 벌어지지 않으므로 온전히 세 배우의 역량으로만 100분을 끌고 나가야 하는 작품이다. 지금까지 다른 캐스팅으로 이 연극을 몇 번인가 봤지만 이번 무대만큼 정신없이 웃었던 적은 없었다. 너무 웃다가 나중에는 눈물까지 훔쳐냈다. 다 아는 얘긴데 왜 이러는 거야, 진짜. 박호산 배우님, 여기 관객 하나 죽을 것 같다고요.


친구들을 사랑하지만 깐족대고 잘난 체하기 좋아하는 마크가 현실에 있다면 정확히 박은석 배우의 모습일 것이다. 사실 이전에 다른 작품에서도 본 적이 있었지만 이만큼 존재감은 없었다(네,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하지만 이번 무대는 달랐다. 화를 내고 깐족대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이 연약한 마크의 모습을 이만큼 잘 보여줄 수 있는 배우가 있을지.


디테일까지 놓치지 않으려 노력한 성훈 배우도 좋았지만 내가 극장을 찾은 이유인 박호산 배우의 열연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어눌한 듯 보이는 이반 역을 하는 것이 박호산 배우인지, 그냥 박호산 배우가 어눌한 것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등장인물이 배우에 따라 어떻게 다르게 표현될 수 있는지 또 한 번 느끼게 해 준 탁월한 무대였다.


큰 극장이지만 배우들이 마이크를 사용하기 때문에 대사 전달에는 큰 무리가 없다. 배우들 건강에 유념하시면서 무대를 지켜주시기를. 친구와 우정,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유쾌한 이 연극은 5월 12일까지 링크아트센터 벅스홀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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