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을 가로지르는 벽 양 옆으로 두 개의 의자가 놓여 있다. 유재하의 [가리워진 길]를 배경으로 서서히 밝아진 무대 위에는 두 명의 남자가 앉아 있다. 뒤에는 ‘1920년대, 경성 주재소’라는 글귀가 또렷하다.
둘의 얼굴은 폭행 혹은 고문을 당한 듯 피범벅이다. 독립군 활동을 하다 붙잡힌 용진이 분노와 노여움의 말을 뱉어낼 때 벽 저편의 윤재가 말을 건다. 잡혀온 이유도 다르고, 얼굴을 마주할 수도, 손을 잡을 수도 없는 그들은 나라를 잃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금방 마음을 터놓는다. 만주로 가서 독립군이 되고 싶다는 용진이 함께 갈 것을 권하자 조선에 남아 우리말을 지키고 싶다는 윤재는 이렇게 대답한다.
‘글’ 하고 ‘배움’, 그것이 문학이고 씨앗이다 이 말이요. 그 말이라는 게 입 밖으로 뱉으면 나한테서 떠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실은 듣고 읽고 또 배운 사람들한테 그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땅덩이 빼앗기고, 세간살이까지 다 뺏어가도 말은 남아 있을 테니까.
윤재의 대사는 이 연극이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인 것처럼 들린다. 연극이 무대에 오르고 나면 사실은 보고 듣고, 웃고 울던 관객에게 뿌리를 내리지 않겠느냐고. 그래서 시간이 지나도 관객들의 마음에 영원히 남는 것이 아니냐고 조용히 읊조리는 것 같다.
그렇게 연극은 1920년대의 엄혹했던 일제 강점기를 지나, 제주 4.3 사건이 벌어졌던 1940년대, 5.18 민주화 운동이 일어난 1980년대를 보여준다. 내 나라 역사임에도 되돌아보고 싶지 않을 만큼 굴곡지고 어둡다. 가슴이 아프고 고통스럽다. 마지막 에피소드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혹은 결코 마주해서는 안 되는 2020년대의 어느 미래를 보여준다.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 그것도 비극적인 시간을 소재로 삼았기 때문에 무겁고 진지하기만 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 때문에 상처 입긴 하지만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는 그저 평범한 시민들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욕망이 있고, 꿈을 꾸며, 화를 내고 슬퍼하는 나와 혹은 당신과 같은 사람들이다. 당연히 각자의 사연은 역사의 흐름과 관계없이 태연하고 유머러스하며 심지어 즐겁기도 하다. 게다가 충청도와 제주, 부산과 평양, 서울 사투리로 쏟아지는 대사들은 맛깔스럽고 찰지다. ‘말’과 ‘언어’의 맛이 이보다 상큼할 수 없다.
네 개의 에피소드가 시대별로 이어지지만 연결고리는 없다. 두 명의 배우는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각기 다른 인물들을 보여준다. 하지만 2인극의 묘미란 뭐라고 해도 두 배우의 합이다. 오늘 무대에 등장한 이희준 배우와 최영준 배우는 극강의 합을 보여 주었다. 불 켜진 무대 위에서 배우들은 연기를 펼쳤지만 불이 꺼지면 누군가는 벽을 밀어 최전방의 포대를 만들고 다른 배우는 리어카를 준비했다. 이런 식으로 두 배우만 오롯이 90분을 끌고 갔다. 에피소드 사이 암전이 된 중에도 서로의 등을 두드리고 끌어안으며 최상의 합을 보여주었다.
사전 정보 없이 객석에 앉았던 관계로 1920년대 주재소에서 펼쳐지는 용진과 윤재의 대화에 정신없이 낄낄거리다 문득 눈물을 흘리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당황했다. 짧은 에피소드들은 이야기를 에두르지 않는다. 본 이야기로 쑥 관객을 끌고 들어간다. 거리를 두고 무대를 판단할 시간을 주지 않고 배우들의 이야기에 몰입하게 만든다. 이야기 구조뿐 아니라 탄탄한 배우들의 연기력 역시 관객들의 눈길이 흐트러질 틈을 주지 않는다. 덕분에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감정이 폭발해 버렸다.
내 경우는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폭발했지만 내 옆에 앉아 있던 관객에게는 그 시점이 두 번째 에피소드였던 것 같다. 세 번째, 네 번째 에피소드는 둘 다 울다 웃다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초면이었고 사실 얼굴도 잘 못 봤지만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옆 관객님.
이렇게 웃고 떠들고 나름대로 평화로운 일상을 살아가고는 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아직 우리나라는 휴전 중이다. 전쟁이 잠시 멈춘 틈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Don’t War’를 외치는 문석의 말처럼 지금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전쟁도 없고 위험도 사라진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그런 것이 있을 리 없다. 유쾌하고 즐겁게 웃는 순간에도 묵직한 울림을 주는 이 연극은 5월 26일까지 서경대학교 공연 예술센터 스콘 2관에서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