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 버터플라이]는 미국의 극작가 데이비드 헨리 황(David Henry Hwang)이 1988년 발표한 희곡이다. 1993년 제레미 아이언스(Jeremy John Irons)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개인적으로 변태적인 사랑을 연기하는 배우로는 제레미 아이언스가 원탑이라고 생각합니다. 하하~) 중국에 파견된 프랑스 외교관이 현지인 경극배우와 사랑에 빠져 20년간 불륜을 저지르며 아이까지 낳고 살았지만 결국 상대는 남자, 그것도 중국의 스파이였다는 충격적인 내용이다.
어떤 작가가 주인공이 20년간 함께 산 사람의 성별을 몰랐다는 이야기를 소설로 썼다면 개연성이 부족하고 억지스럽다는 평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작품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1964년 프랑스 외교관 베르나르 부리스코(Bernard Boursicot)는 중국에서 근무하던 중 경극 배우 시페이푸(Shi Pei Pu)와 불륜에 빠진다. 20년 동안 이어지던 이들의 관계는 1983년 시페이푸가 스파이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면서 드러난다. 두 사람은 1986년 재판을 통해 6년 형을 선고받지만 1987년 중국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풀려나고, 이후 이들의 이야기는 신문 기사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1988년 발표됐던 희곡 [엠 버터플라이]는 2017년 원작자에 의해 대대적인 개작이 이뤄졌다. 그러니까 2024년 만나는 [엠. 버터플라이]는 이전의 작품과는 조금 다른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앞서 말한 제레미 아이언스 주연의 영화와도 결이 다르다.
무대 위에는 속은 비치지만 불투명하고 거대한 막이 둘러져 있다. 불이 켜지면 테이블 위에 웅크리고 있던 남자가 일어나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의 이름은 르네 갈리마르. 스파이 혐의로 감옥에 갇혀 있다. 그는 관객을 향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왜 그곳에 있게 되었는지, 송릴링과의 사이에서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중국 주재 프랑스 외교관인 르네 갈리마르는 파티에서 푸치니의 오페라 [엠 버터플라이] 속 아리아를 노래하는 송릴링을 만난다. 뮤지컬 [미스 사이공]의 핵심 모티프로 사용되기도 한 푸치니의 이 작품은 줄거리부터 인종차별적이고 제국주의적이다.
1904년 미국의 해군 장교 핑커튼은 일본에 머물며 초초상과 결혼식을 올린다. 제대로 된 결혼은 아니고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현지 처 개념으로 함께 살기 위해서다. 이런 핑커튼과 달리 초초상은 이 결혼에 진심이었다! 얼마 후 핑커튼은 본국으로 떠나고 홀로 남은 초초상은 아이를 낳아 키우며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3년 후 핑커튼은 아내 케이트와 함께 일본으로 돌아온다. 케이트가 아이를 데려간 후 홀로 남은 초초상은 자살한다는 내용이다. 동양인 여성인 나로서는 근처에 돌 같은 것이 있으면 한 번쯤 던져볼까 싶은 마음이 드는 줄거리이다.
연극 [엠. 버터플라이]는 푸치니의 오페라를 교묘하게 변형한다. 오페라 속 해군 장교 핑커튼처럼 르네 갈리마르는 동양에 대해 제국주의적 인식을 가지고 있다. 동양인들은 힘이 센 상대를 무조건적으로 추종하며 지저분하고 믿을 수 없는 존재들이다. 송릴링과 연인 사이가 되지만 결혼을 할 마음도, 본국으로 함께 갈 마음도, 심지어 이혼할 마음도 없다.
하지만 오페라 속 초초상과 달리 현실의 송릴링은 복잡하고 미묘한 존재다. 게다가 르네 갈리마르가 외교관 일을 시작한 1964년은 중국의 문화 대혁명이 막 일어나려던 시기였다. 마오쩌뚱의 지휘 아래 온 중국이 내란에 버금갈 정도로 타격을 입은 시대이고, 홍위병으로 대표되는 폭력적인 세력이 체제와 질서를 초토화시킨 최악의 시기였다.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송릴링은 초초상과는 다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시대도 달라졌다. 제국주의는 이미 막을 내렸다.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제물로 삼아 거대한 식민지를 건설하던 때와 달리 서방은 베트남 한 나라와의 싸움에서조차 승리를 낙관할 수 없다.
이런 차이로 인해 오페라의 이야기와 연극의 줄거리가 씨줄과 날줄처럼 교차된다. 르네와 송릴링이 서로를 바라보는 관점도 마찬가지다. 있는 그대로와 환상에 관한 이야기 역시 잘 조율된 현악기들의 화음처럼 녹아들어 있다. 사랑과 섹스, 남자와 여자 등 당연하다고 생각되던 개념들도 한 번씩 곱씹게 된다. 어쩌면 우리가 당연하게 ‘세계’라고 받아들인 것이 사실은 우리 자신들이 만든 거대한 환상인지도 모르겠다. 무대를 두르고 있는 불투명한 장막처럼 이 연극은 우리에게 익숙한 개념들을 낯설게 만들어 다시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만든다.
이재균 배우는 혼란에 빠진 르네를 귀엽고 사랑스럽게 표현했다. 제레미 아이언스의 르네와는 사뭇 다른 인물이지만 어쩐지 설득력이 있었다. 오대석 배우와 김보나 배우의 연기는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여자인 듯 남자인 듯 경계를 넘나드는 송릴링 역의 김바다 배우도 아름다웠지만 차분하고 잔잔한 발성을 내다보니 2층까지 대사가 전달됐을지는 의문이다. 1층 중간에 앉은 나도 주의를 꽤 집중하지 않으면 대사가 잘 들리지 않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이크를 사용하는 방법을 한 번쯤 고려하는 것이 어떨지.
2017년 개작한 작품을 처음 무대에 올렸지만 딱딱한 번역체 말투가 없어 반가웠다. 각색해 무대에 오르는 작품들을 보고 있자면 몇 문장쯤은 어색하게 귀에 덜그럭거리기 마련인데 이 연극의 대사들은 명징하게 귀에 꽂혔다. 무대 위에 드리워진 장막처럼 무엇인가 내 시선을 가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연극이 끝난 한참 후까지도 생각을 거듭하게 되는 좋은 작품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호불호가 갈릴 작품이다. 사랑하는 사이인 두 명의 남자 배우가 펼치는 애정 장면이 거슬리는 분들은 한 번쯤 고민을 하신 후 극장을 찾으시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래봐야 가벼운 키스신 정도이긴 하지만. 기쁨과 유머가 가득한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짜임새 있는 구성 위로 여러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작품이다. 5월 12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