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국회.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났던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군대를 투입하고 자국민을 향해 발포한 살인마 전두환을 증인으로 부른 제5 공화국 청문회장은 몹시 소란스러웠다. 증인으로 나온 전두환이 질문을 받고 대답하는 ‘청문회’라는 형식 자체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국회의장은 ‘전직 대통령의 예우’라는 말을 부끄러움 없이 늘어놓으며 질문 없이 전두환의 일방적인 답변을 들어야 한다고 결정한다.
전두환은 1980년 5월 18일부터 약 10일 동안 섬처럼 고립된 광주에서 벌어진 학살과 폭력이 ‘자위권’ 즉 자국의 국민을 지키기 위한 통치 행위였다고 주장한다. 전국으로 생중계된 청문회장에서 전두환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어떤 방해도 없이 줄줄줄 늘어놓는다. 일부 의원들의 항의와 고성, 그것을 막겠다는 반대당 의원들의 막말이 오가고 예의를 지키라는 국회의장의 훈계가 이어지는 가운데 일방적인 답변마저 중단한 증인이 청문회장을 빠져나간다.
그것을 바라보던 한 초선의원이 명패를 내던진다. 국민의 비난은 누가 책임질 거냐며 거칠게 항의한다. 부산 동구를 지역구로 둔 제13대 국회의 초선의원 노무현이 대한민국 국민들의 가슴에 각인된 순간이었다. 어떤 이의 마음에는 후련하게 나를 대변해 주는 제대로 된 정치인의 모습으로, 어떤 사람들의 가슴에는 절대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은 건방진 피지배자의 얼굴로. 하지만 노무현을 어떤 모습으로 평가했든 한 가지 사실만은 공유해야 했다. 정치인, 그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 노무현이 대한민국 국민들의 마음속에 큰 존재감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극장 입구에는 고 노무현 대통령의 포스터가 걸려 있다. 그 뒤로 이 연극의 주인공 최수호를 맡은 배우들의 포스터가 이어진다. 예매처 소개란에도 이미 고 노무현 대통령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기 때문에 이 연극이 어떤 의도로 만들어졌는지 헷갈릴 필요는 없다. 이 연극은 노무현 대통령의 초선의원 시절을 이야기하고 있다.
오륜마크가 달린 무대 위에는 작은 모니터가 걸려 있고 코리아나의 ‘손에 손잡고’와 정수라의 ‘아 대한민국’이 관객석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1988년은 대한민국에게 특별한 해였다. 살인마 전두환의 뒤를 이은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었으며, 서울에서 올림픽이 개최되었다. 그리고 부산의 변호사였던 노무현이 국회에 입성했다.
이 연극은 밝고 깨끗하고 환한 것으로 상징되는 올림픽과 초선의원 최수호를 대비시킨다. 올림픽이 개최되는 서울에 판자촌이 있다니 말도 안 된다. 그곳에 거주하던 국민들은 폭력적으로 도시 외곽으로 밀려난다. 나라가 경제 발전을 이룩해야 하는데 노동자의 기본권 따위가 대수인가? 최저임금에 허덕이며 수은중독으로 죽어가도 국가는 주목하지 않는다. 입을 열면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갔고, 시위 중에 잡힌 학생들은 주검이 되어 돌아왔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 다치지 않기 위해, 자신의 몸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고개를 숙인 채 비겁해져야 했다. 그런 시대고 그런 나라였다. 절대로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시간이었다. 그런데 ‘노무현’이라는 작은 균열이 감지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연극은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관련되어 있던 사건들을 그대로 가져왔다. 스포일까 봐 쓰지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 생각해 보니, 그렇다면 고인의 삶 자체가 스포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모르는 사람들은 모른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쓰기로 하겠다.
연극에는 급성 수은 중독으로 15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어린 노동자 문송면과 노동운동을 하다 경찰이 쏜 최루탄을 맞고 사망한 노동자 이석규에 관한 일화들이 나열된다. 뜨겁고 가슴 뛰는 최수호의 활약도 이어지지만 성공은 아니다. 야심 차게 준비한 노동 3법은 당시 대통령 노태우의 거부권으로 무산된다. 초선 의원 최수호는 좌절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이 연극은 딱 그 지점, 초선의원 최수호가 더 큰 꿈을 꾸게 되는 지점에서 끝난다.
아무래도 무거운 이야기를 하려다 보니 연극의 형식은 최대한 가볍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관객들의 부담을 줄여주겠다는 의도가 피부로 느껴진다. 소방차의 노래에 맞춰 배우들은 몸을 흔들고 과장된 몸짓으로 객석에 웃음을 준다. 관객들도 박수와 웃음으로 호응했다.
모든 배우들이 혼신을 다하는 무대다. 1인 몇 역을 소화해야 하다 보니 쉴 틈도 없다. 정명군 배우가 연기한 유격수라는 인물은 아마도 김영삼 대통령에게서 모티프를 가져왔을 것이다. 노회한 정치인의 모습이 잔뜩 묻어났다. 지난 시간을 알고 있는 관객이라면 어떤 배역이 어느 인물에서 온 것인지 떠올리는 것도 쏠쏠한 재미가 될 것 같다.
지금껏 송용진 배우의 무대를 꽤 봤는데 이번이 레전드라고 생각한다. 엄청난 대사와 폭풍 같은 감정 연기를 소화해 내는 것을 보고 마침내 배우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공연 첫날을 저런 텐션으로 소화해 버리면 마지막 공연까지 목은 괜찮을까, 몸은 움직일 수 있나 안타까운 마음까지 들었다. 송용진 배우님, 몸을 좀 사리시고 끝까지 계속해 주세요. 정말 최고의 무대였습니다. 쌍엄지 척척~!
5 공화국 청문회에서 당당한 모습으로 전직 안기부장 장세동과 맞짱을 뜨고, 비리 경제인들을 몰아세우던 초선 의원 최수호는 현실의 벽 앞에서 무너진다. 강건한 보좌관 이명제가 그를 위로한다. 최수호는 마음을 다잡고 학살의 책임자를 법정에 세우겠다고 결심한다. 반드시 살아서 학살의 책임자가 심판받는 것을 보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2009년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하는 순간까지 전두환은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다. 2021년 자연사하던 그날까지 전두환은 평화로웠고 부유했고 당당했다. 현실은 허구보다 아팠고, 덕분에 연극을 지켜보는 내내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마음이 무거웠다. 그 마음은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노무현 대통령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이 연극을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그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과거 인물의 삶을 왜 돌아봐야 하는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떠나 송용진 배우의 연기가 압권이다. 2시간 동안 이어지는 송용진 배우의 엄청난 연기를 보고 싶다면 5월 12일까지 대학로 자유극장을 찾으면 된다. 배우님,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