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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Mar 28. 2024

사회의 황무지를 바라보다

연극 [카르타고]

카르타고는 지금의 튀니지에 해당하는 땅에 존재했던 고대 도시 국가다. '디도'라는 여왕이 세웠다는 전설을 가진 카르타고는 해양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으며 로마와는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패권 경쟁을 벌였다.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이 활동하던 시기에는 로마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갔을 정도로 강력했지만, BC 146년 로마의 스키피오 장군에게 패배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3차에 걸친 포에니 전쟁이 얼마나 힘겨웠던지 로마 장군 스키피오는 카르타고를 점령한 뒤 남은 백성들을 죽이거나 노예로 팔아 버리고 그 땅에서는 풀 한 포기 자랄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AD 1세기 아우구스투스가 그 버려진 땅을 재건할 때까지 황무지로 방치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연극의 제목이 왜 ‘카르타고’일까 궁금한 마음을 품은 채 객석에 앉았다. 영국의 작가 크리스 톰슨(Chris Thompson)은 2014년에 발표한 이 작품에 사회복지사로 12년 동안 일했던 자신의 경험을 고스란히 담았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2021년 초연되었고 이번이 두 번째 무대다.




6개의 구역으로 나뉜 객석이 무대를 내려다보게 배치되어 있다. 길쭉하게 남은 원형의 바닥에는 나무 상자 두 개가 놓여 있을 뿐 황량하고 썰렁하다. 불이 켜지면 두 사람의 대화가 들린다.


"정말 올 거지?"
"응."
"언제?"
"곧."
"그런데 정말 올 거지?"

이 대화가 누구의 말인지,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지는 극이 진행되며 밝혀지지만 목소리의 색깔 만으로 이미 관객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기는 충분하다.


목소리의 남자 주인공은 토미다. 토미 앤더슨은 감옥에서 태어났다. 목소리의 또 다른 주인인 엄마 앤이 15세에 감옥에서 그를 낳았기 때문이다. 사회복지사 수는 앤과 토미를 위해 최선을 다 하지만 그들의 삶을 ‘정상적’인 궤도로 올려놓기에는 부족했다. 범죄와 마약은 가깝고 현실은 힘겨웠으니까. 엄마 앤은 아이를 양육할 만큼 인내심이 풍부하지도 교육을 받지도 못했다. 즉흥적인 관심과 사랑을 줄 수 있었을 뿐. 그 아래서 토미는 화를 내는 것 외에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아이로 성장한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10대의 토미 역시 보모관찰소에 갇힌다. 난폭하고 제어하기 힘들고 제멋대로인 토미는 교도관에게 대들다 제지당하는 과정에서 사망한다. 그 순간은 CCTV에 고스란히 남았지만 교도관 마커스는 결국 무죄 선고를 받는다. 연극은 이 과정을, 그러니까 토미의 일생과 그 이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들이 정말 원하는 건 안아 주길 원하는 거예요.


극 중 교도관인 마커스는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사회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즐거움과 아름다움이 가득한 연극은 아니다. 무겁고 진지하고 묵직하다. 극은 사건의 순서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이야기는 짧게 토막 난 채 시간의 순서와 관계없이 배열된다. 결국 토미의 죽음이 누구의 탓이었는지, 남은 자들은 그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극이 끝날 때까지 숨을 죽인 채 지켜봐야 한다. 무엇보다 고통스러운 점은 왜 토미가 보호관찰소에 들어갔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마치 그럴 만한 사람이니 언제든 들어갔을 거야,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가 가진 고정관념처럼.


애니 역의 조수연 배우는 광기 어린 연기를 보여주었다. 관객으로서는 도저히 감정이입 할 수 없는 애니라는 인물을 최대한 공평하게 바라보게 만들어 준 것은 조수연 배우의 힘이었던 것 같다. 사회복지사 수를 연기한 김정아 배우는 두 시간 동안 진행된 연극 속에서 유일하게 숨 쉴 틈을 줬다. 잠깐이나마 이 무거운 극에서 벗어나 미소를 짓게 만들어줬다. 


맨 바닥에서 진행된, 배우들이 직접 옮기던 철제 가구 몇 개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는 세트 자체가 연극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전해주었다. 소금이 뿌려진 카르타고의 대지처럼 그들의 삶에 남은 것은 이제 없다는 것을 이보다 명징하게 보여줄 방법이 있었을까.


연극을 보는 내내 켄 로치 감독의 영화들이 떠올랐다. 사회의 밑바닥을 바라보지만 따스한 시선을 가진 노감독의 영화와 달리 이 연극은 잔인하고 힘겨운 상황을 그저 보여준다. 어쩌면 이 상태를 구원할 방법은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사회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여러 가지 의문을 떠올리게 하는 무겁고 진지한 이 작품은 3월 31일까지 대학로 극장 쿼드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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