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안 Apr 03. 2024

헛되고 헛되도다

-  연극 [욘]


이 연극의 원작은 헨리크 입센(Henrik Ibsen)이 1896년 발표한 희곡 [욘 가브리엘 보르크만(John Gabriel Borkman)]이다.


19세기 작품, 그러니까 고전이 무대에 올려질 때는 관객입장에서도 긴장하게 된다. 원작을 그대로 구현한 것인지, 원작을 바탕에 뒀지만 현대의 감성을 입힌 것인지에 따라 호불호가 나뉘기도 하고 극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내 경우는 고전이라도 현대적인 감성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 편이다. 19세기의 이야기를 지금 듣고 있을 이유는 별로 없으니까. 지금의 우리가 생각하거나 느낄 지점이 없다면 고전은 그 시간에 내버려 두는 것이 오히려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떤 작품은 원작의 감정이나 주장이 현재에까지 유효한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그 시대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관객이 입장하는 중에도 한 남자가 무대를 서성이고 있다. 창문으로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눈발이 보인다. 그는 소파와 의자, 책상과 문이 있는 무대 위를 그야말로 방황한다. 그의 이름은 ‘욘 가브리엘 보르크만’. 한때는 총리 후보까지 거론될 정도로 잘 나가는 금융인이었지만 한순간 나락으로 떨어졌다. 지금으로 치자면 일종의 폰지 사기범이다. 8년간 복역한 후 출소하여 집으로 돌아왔지만 아내와는 8년간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2층 방에 처박혀 계속 방을 서성거릴 뿐이다. 8년 동안 그의 발소리는 집 전체를 가득 채우며 음울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저벅 저벅 저벅.


그의 아내인 귀닐에게 남은 것은 아들 엘하르트뿐이다. 집에서 가까운 학교에 다니고 있는 엘하르트에게 귀닐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조선 시대 몰락한 양반집 여성이 유복자 아들에게 온 희망을 걸고 있는 상황을 떠올리면 쉽다. 그리고 귀닐과 쌍둥이처럼 닮은 언니이자 어린 엘하르트를 10년 이상 키웠던 엘라가 찾아온다. 욘의 범죄로 인해 모든 재산과 사회적 지위, 명성들은 사라졌고 욘과 귀닐 그리고 엘하르트는 오직 언니 엘라의 돈에 의지해 살고 있다. 그러나 엘라의 방문을 받은 귀닐의 반응은 영 떨떠름하다.

 

나는 늘 춥거든.


집이 덥다는 엘라에게 귀닐이 쏘아붙인다. 귀닐의 마음속에 지옥도가 펼쳐져 있으니 늘 추울 수밖에 없다. 왜, 어쩌다 그런 지옥도가 그려지게 된 것인지는 극이 진행되면서 밝혀지는데, 아침 드라마 급의 막장드라마다.


난 엘하르트가 행복을 찾게 도와주고 싶었어.


어린 엘하르트를 키웠던 엘라가 ‘키운 정’을 앞세워 주장한다. 하지만 막장 드라마 속 사연을 듣다 보면 엘라가 집착하는 것이 엘하르트인지, 과거인지, 사랑인지 알 수가 없다. 우리 모두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처럼.


8년간 집안을 서성거리는 욘에게 남은 것은 ‘과거’뿐이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자신의 힘으로 한 번에 회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적어도 믿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들과 마주한 욘 역시 엘하르트에게 집착하게 된다. 집착만으로 모든 일을 이룰 수 있다면 그보다 쉬운 길은 없을 테니까. 엘라와 귀닐, 욘은 말 그대로 엘하르트를 사이에 두고 싸움을 벌인다. 참다못한 엘하르트가 외친다.


이제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해요. 내 생각으로, 내 의지로요.


모든 비극에서 나이 든 사람과 젊은 세대의 갈등은 젊은이들의 승리로 끝난다. 어쩔 수 없다. 시간은 그들의 편이고, 세상 역시 그들에게 호의적이다. 이 연극에서도 마찬가지다. 눈여겨볼 지점은 그 이후다. 그렇게 떠나버리고 남은 세대, 남은 늙은이들의 이야기다.




욘은 자신의 과거로 상징되는 집을 떠난다. 그렇게 거창한 방황은 아니다. 8년만에 그저 코트를 입고 문 밖으로 나갔을 뿐이다. 밖에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다는 사소한 문제가 있었을 뿐. 문 밖으로 나선 욘의 머리 위로 엄청난 눈이 쏟아져 내린다.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눈이 표현돼서 연극을 보다 깜짝 놀랐다. 아름답고 독특하다. 욘은 방황하는 리어왕처럼 한때 자신의 왕국이라 믿었던 곳을 바라보며 긴 독백을 한다. 이 독백에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들이 담겨있었던 듯하다. 헛되고 헛된 이야기.


[인형의 집]의 작가답게 등장인물 중 여성 캐릭터들에 눈에 들어온다. 보르크만 가문 사람들에게 험한 말을 듣던 빌톤 부인은 상황을 인내하며 이렇게 말한다. 목소리는 매우 당당하다.


피할 수 없는 일이라 견뎌보려 합니다.


좋은 자세다. 빌톤 부인은 행복해질 자격이 있다.


 그렇다면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아마도 이미 남은 사람의 나이에 접어든 나로서는 생각할 거리가 있는 연극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욘의 대사를 젊은이들에게 날려주고 싶다.

빠른 길로, 어디든 네가 가고 싶은 대로 잘 가거라

젊은이들, 행복해야 하네!!



19세기 복장 그대로 긴치마와 프록코트를 펄럭이며 배우들은 무대 위에서 최선을 다했다. 귀닐 역의 이주영 배우가 눈에 담겼다. 난장판에서 가장 힘겨웠을 그녀다. 엘라에게 어깨를 기대며 우는 마지막 장면에 가슴이 저렸다.


관록 있는 배우들의 무대였지만 그렇게 합이 좋았는가 하면 그런 느낌은 들지 않았다. 목소리의 톤도 강약도 어딘지 조금씩 일그러진 느낌이 들었다. 고전적 대사를 하다 드라마적 애드리브가 섞인 것을 보는 느낌이었달까.


앞에서도 말했지만 폭설이 쏟아지는 부분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 장면을 보기 위해서라도 찾아갈 가치는 충분한 연극 [욘]은 4월 21일까지 세종문화회관 M시어터에서 만날 수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회의 황무지를 바라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