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안 Apr 06. 2024

4. 붉은 꽃은 술이 되고

- 면천 두견주 이야기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사망한다. 역사적인 평가는 여러 가지로 내릴 수 있겠지만 모든 것을 떠나 고종은 대한제국의 황제였다. 한일합방 후 '이태왕(李太王)'으로 강등 됐지만 백성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임금이었다. 문제는 고종과 마찬가지로 역사적으로 할 말이 많은 인물인 황후 민비가 일본 낭인들의 칼에 죽임을 당한 것으로 모자라 고종의 죽음도 독살이라는 소문이 돈 것이다. 말은 빛보다 빠르다.


일제는 고종의 장례를 황제의 국장이 아닌 왕족의 장례로 축소시켰다. 고종의 장례위원회를 도쿄에 두고(응? 왜?), 조선 총독부가 위원회의 조언에 따라 조선식과 일본식이 결합된 희한한 형태의 장례식을 고안했다. 통칭 6개월간 이어지는 국상기간도 3개월로 단축해 버렸다. 그리하여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고종의 국상일은 3월 3일이 되었다.


당시 백성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전쟁 한번 치르지 않고 고스란히 나라를 잃어버린 어이없는 국왕이긴 했지만 ‘패도 내가 팬다’는 마음은 아니었을까? 아무리 미운 왕이라도 적들의 손에 떨어져 모욕당하는 상황을 평온하게 받아들일 조선 사람은 일제 부역자를 제외하고는 없었을 것이다.


면천 객사 안에 복지겸의 딸 영랑이 심었다는 수령 1100년의 은행나무가 서 있다.

고종의 사망사실이 알려진 후 종교계와 학생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3월 1일 고종 장례 예행연습일에 맞춰 모여든 백성들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시위를 벌였다. 조선총독부의 통제 때문에 이 사건은 3월 7일이 되어야 보도가 되기 시작했지만, 그 시위를 목격한 학생 원용은의 마음은 그보다 빨리 움직였다.


3월 10일 충남 당진의 면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은 자비로 만든 현수막과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친다. 3월 1일의 독립운동을 눈으로 직접 확인한 원용은이 고향으로 돌아와 박창신, 이종원 등과 함께 만세운동을 주도한 것이다.


현재 ‘학생독립운동 기념일’로 지정되어 있는 11월 3일은 1929년 11월 3일 일제강점기의 전라도 광주에서 일어난 ‘광주 학생 항일운동’을 기념해 지정한 날이다. 그렇다면 1919년 3월 10일에 일어난 ‘면천공립보통학교 3.10 독립만세운동’은 그보다 10년 정도 앞선 셈이다. 당진시민이나 면천군민들의 입장에서는 선수를 빼앗긴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들 수도 있겠다.


원용은 선생은 2021년 독립운동가로 인정을 받으셨지만 ‘면천 공립보통학교 3.10 독립만세운동’ 자체는 알려지지 않은 느낌이다. 나 역시 2024년 문을 열었다는 ‘면천공립보통학교 3.10 학생독립만세운동 기념관’에 오기 전까지는 몰랐던 사실이다. 정갈하고 소박한 기념관이 마음속에 들어오긴 하지만 일단 명칭이 너무 길다. 긴 이름을 기억해 해마다 마음에 새기기는 어렵다. 어떻게 이름을 고치는 것이 좋을까 고민하며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면천군 객사에 도착하게 된다.


군자정을 지나면 안샘을 찾을 수 있다. 지금은 이 물로 술을 빚지 않는다.


객사 안에는 고려의 개국공신 중 하나인 복지겸의 딸 영랑이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있다. 수령이 1100년이 넘었다는 유명한 이 은행나무는 ‘면천 두견주’에 대해 말할 때마다 언급된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복지겸의 건강이 나빠지자 그의 딸이 면천군에서 가장 높은 산인 아미산에 올라 기도를 드렸다. 이럴 때 산신령이 꿈에 등장하지 않으면 이야기 전개가 어렵다. 산신령은 “아미산에 활짝 핀 두견화와 찹쌀, 그리고 안샘의 물로 술을 빚어 100일이 지난 후 마시게 하고, 뜰에 두 그루의 은행나무를 심고 정성을 들이면 아비의 병이 나을 것”이라는 신탁을 준다.


예상대로 영랑은 산신령의 말을 잘 따랐고 복지겸은 건강을 되찾았다. 두견화, 즉 진달래는 3월에서 4월 사이 15일에서 20일 정도 집중적으로 꽃을 피운다. 복지겸은 아마도 긴 겨울 동안 시름시름 앓으며 딸의 마음을 어지럽게 했던 모양이다.


우리나라에 유명한 설화가 얼마나 많습니까? 홍길동도 있고 장화홍련도 있고 심청이도 있잖아요. 그 이야기들과 면천 두견주 이야기의 차이점이 어디겠습니까? 그 이야기들에는 스토리만 있지만, 면천 두견주 이야기에는 증거가 되는 현장이 있다는 겁니다.

아미산은 당연히 있고요, 복지겸 장군의 묘와 은행나무, 지금은 그 물을 사용하지 않지만 안샘도 존재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없는 것은 산신령 정도예요. 그건 어쩔 수 없쥬. 이만하면 진실성이 있지 않습니까? 진달래는 옛날부터 약재로 사용했습니다. 기관지 염이나 진해 해소 같은 것에 효험이 있었다고 합니다.


양조장을 겸하고 있는 면천 두견주 전수 교육관에서 설명을 맡은 ‘면천 두견주 보존협회’ 회장님이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를 섞어 설명해 주었다.


면천 두견주 전수 교육관 겸 양조장


진달래 꽃은 보름정도 핍니다. 이때 빨리 꽃을 따서 꽃술을 제거한 후에 말려서 술에 사용합니다.

술에는 단맛도, 쓴맛도, 잘 헤아려보면 짠맛도 있어요. 그야말로 ‘오미’가 갖춰져 있죠. 그런데 여기에 진달래를 너무 많이 넣으면 밸런스가 깨집니다. 진달래 꽃은 시큼한 신맛을 강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맛이 있을 정도의 양을 가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회장님의 말씀대로 두견주를 한 모금 삼키자 식욕이 자극될 정도의 달큰한 산미가 느껴졌다. 향으로는 진달래를 구별할 수 없다. 살짝 도는 붉은빛도 진달래라고 알려주지 않으면 알아챌 수 없을 정도다. 효능을 떠나 달고 산미가 있는 좋은 맛의 술이다.




이 동네는 원래 술이 유명합니다. 근처에 막걸리 공장만 50개가 넘습니다. 하지만 두견주는 여기뿐입니다. 두견주는 9월, 10월에 담근 것을 최고로 칩니다. 옛날에 주막에서 두견주를 먹고 닷냥을 계산했는데 주모가 충청도 사투리로 뒤에서 ‘그거 9월에 담근 건데......’ 이렇게 손님만 들리게 구시렁거리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닷냥을 더 내어줬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그때 만든 술이 좋습니다. 지금 드시고 있는 것이 그 시기에 만든 술입니다.


일제 강점기 모든 가양주들의 공통적인 운명처럼 ‘면천 두견주’역시 거의 맥이 끊길 뻔했다. 딱 한 명, 박승규라는 분이 집안에 내려오는 조리법에 따라 두견주를 빚었고, 이 술이 1986년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된다.

두견주 양조장  내부의 모습. 일반인이 들어갈 수는 없고 유리를 통해 일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2002년 박승규 씨가 급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두견주마저 명맥이 끊길 처지가 됐다. 그의 아들이 전통을 이어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 함께 진달래를 수확하고 술을 빚던 마을 사람들이 뭉쳐 ‘면천두견주보존회’를 결성해 술을 생산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받은 술은 40도 소주인 김포의 ‘문배주’와 17도 약주인 경주 ‘교동법주’ 그리고 ‘두견주’ 세 가지뿐이다. 하지만 개인이 아닌 마을 주민들이 보존화를 만들어 지역 특산물을 이용하고 또한 문화를 보존, 공유해 가는 술은 두견주가 유일하다.

진달래가 피는 계절에 꽃을 수확해 사용한다. 꽃잎을 따는 작업, 수술을 고르는 과정은 힘든 노동이다.


지금도 두견주는 옛 방식 그대로 찹쌀과 누룩, 진달래와 물을 이용해 빚는다. 복지겸의 딸이 사용했다는 안샘의 물은 지금은 쓸 수 없다. 인구와 환경 문제가 안샘을 아직까지 청정한 상태로 내버려 두지는 않은 것이다.


물과 불이 섞인 것이 술입니다. 수와 불이 섞였다고 해서 ‘수불수불’하다가 ‘술’이 됐다고 하죠. 그래서 술을 마시면 물 불을 가리지 않게 됩니다. 진달래가 아무리 몸에 좋다지만 너무 많이 마시면 좋지 않아요. 적당히 드시는 것이 좋습니다.


무엇이든 적당한 것이 좋다. 게다가 이 두견주는 18도의 높은 도수를 자랑한다. 하지만 한 입 머금으면 순한 맛에 이끌려 도수를 짐작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주의할 것. 독립운동의 역사를 간직한 면천의 두견주는 차분한 마음으로 정갈하게 즐길 때 가장 빛나는 술이 될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3. 원하는 술 다 줄 수 있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