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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Apr 24. 2024

5. 내 고향 오산은 까마귀가 취하는 곳

-  오산 양조장

중국 서진 사람인 진수가 3세기에 편찬한 [삼국지위지동이전]에는 고구려인에 대한 이런 묘사가 등장한다.


백성들은 노래와 춤을 좋아하여, 나라 안의 촌락마다 밤이 되면 남녀가 떼 지어 모여서 서로 노래하며 유희를 즐긴다…… 그 나라 사람들은 깨끗한 것을 좋아하며, 술을 잘 빚는다……


2000년이 흐른 후 그 백성들의 후예 즉, ‘BTS’나 ‘블랙핑크’, ‘뉴진스’ 같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중국을 포함한 전 세계 음악 시장을 휩쓸 것이라는 것을 서진 사람 진수가 예상했을 리는 없다. 한적해 보이는 한국의 어느 도시 모퉁이를 돌 때마다 코인노래방을 비롯해 다양한 ‘노래하며 유희를 즐기’는 장소가 나타날 것도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다만 진수가 보기에 온 백성이 누구 하나 빼지 않고 풍류를 즐기는 모습은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강렬했던 것 같다.


고구려 벽화에도 등장하는 삼족오


어스름하게 어둠이 내린 고구려의 깨끗한 거리를 상상해 본다. 이곳저곳에서 각기 다른 노래 가락이 흘러나오고 그 사이로 사람들의 웃음소리도 들렸을 것이다. 그들의 손에 잘 빚은 술 한잔이 들려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런 많은 사람들의 머리 위로 고구려의 상징새인 까마귀 ‘삼족오’가 날아다녔을지도 모르겠다.




비 내리는 오전, 이런 생각들을 두서없이 떠올리며 양조장으로 향했다. 서울에서 출발하여 남쪽으로 달리다 보면 광명과 수원을 지나 오산이라는 지명과 만난다. 도시의 정확한 유래에 대해 알 수는 없지만 “까마귀가 많이 모여 산의 모양을 갖췄다”는 의미에서 ‘오산(烏山)’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믿거나 말거나의 영역이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오산 시민들은 이 설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시의 상징 새를 까마귀로 정하고, ‘까산이’와 ‘까오’라는 마스코트도 만들었다. 삼족오를 무덤에 장식했던 고구려인들처럼 까마귀를 자신들의 상징으로 선택했다.


오산시의 마스코트. 가운데가 까산이, 오른쪽이 까오


오산 막걸리는 오산 특산품인 ‘세마쌀’로만 만듭니다. 오산은 농지가 그렇게 많은 도시가 아니에요. 그래서 세마쌀을 제외하고 다른 특산품은 많이 없어요. 그래서 우리 양조장도 세마쌀로 만드는 순곡주 형태로만 술을 출시합니다. 앞에 보시는 [경기 막걸리]는 이양주입니다. [하얀 까마귀]는 삼양주고요.

대대로 전통5일장이 열렸던 ‘오산 시장’ 초입에 자리 잡고 있는 ‘오산 양조장’의 담당자가 이런 설명을 들려주었다.


‘오산 양조장’은 술을 만드는 작업장과 판매장이 길 한쪽에, 술을 체험하고 시음할 수 있는 공간이 그 길 맞은편에 위치해 있다. 언제라도 전통주를 맛보거나 빚어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공간이다. 특히 오산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언제라도 방문하기 편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대도시에서는 쉽게 느끼기 어려운 친밀감이다. 그러니까 이 양조장은 오산’이라는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 모여 그곳의 특산품으로 맛있는 술을 빚어보겠다는 꿈이 형상화된 공간이다.


오산 양조장 판매장


그렇다면 ‘이양주’와 ‘삼양주’는 무엇일까? 이 단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쌀’로 돌아가야 한다.




알코올은 어떻게 발견되었을까? 술이 만들어진 것은 [삼국지위지동이전]이 편찬되기도 한참 전 일이니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이 사용되었을지 알 방법은 없다. 다만 상상력을 동원해 보면 어떤 풍경에는 도달할 수 있다.


시작은 과일이었을 것이다. 잘 익은 과일이 바닥에 떨어진다. 과즙이 흘러나오다 자연에 존재하는 효모 성분을 만나 부글거리다 몹시 원시적인 형태의 과일주가 되었을 것이다. 사람이라면 굳이 땅에 고인 술까지 탐하지 않았겠지만 까마귀라면 내려앉아 마시지 않았을까? 일단 마시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사실이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인간이 이 과실주를 거부한 것은 아니다. 깨끗한 나무통이나 토기 안에 포도를 으깨서 담아두면 저절로 술이 된 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와인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양조장 안은 그야말로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술을 빚는 시간보다 청소시간이 길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와인이 없이는 살 수 없었겠지만 와인만 있다고 살 수도 없다. 인류에게 필요한 것은 식량이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물은 터키의 괴베클리 테페다. 2022년 넷플릭스에서 만든 [고대의 아포칼립스]라는 다큐멘터리에서 그레이엄 핸콕(Graham Hancock)은 이 괴베클리 테베를 지금의 문명 이전의 초고대문명 사람들이 만든 건축물로 소개한다. 사실 여부를 떠나 그만큼 오래된 건축물이란 소리다. 이 괴베클리 테페에서 수산염의 흔적이 남은, 돌로 만든 커다란 그릇들이 발견되었다. 수산염이란 보리와 물이 섞일 때 만들어지는 성분이다. 물론 보리와 물이 섞여서 단순한 음료가 된 것인지 발효를 거쳐 맥주가 된 것인지까지는 알 수 없다.


단당으로 구성된 과일과는 달리 보리는 여러 개의 당이 뭉친 전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보리를 물에 불리면 싹이 난 상태, 즉 ‘맥아’가 되면서 전분을 분해하는 효소가 생성된다. 그리고 이 효소는 자연스럽게 보리 속의 전분을 분해해 단당으로 만든다. 여기에 효모를 첨가해 발효시키면 맥주가 된다. 물을 첨가하는 방식이 추가되긴 했지만 그래도 간단한 편이다.


오산 양조장에서 생산 중인 오산 막걸리들


문제는 쌀이다. 쌀 속의 전분은 보리와 달리 쉽게 잘라지지 않는다. 물에 불려 게다가 익히기까지 한 밥을 입 속에 넣어봐야 뜨겁기만 할 뿐이다. 그 밥을 씹는 과정에서 침 속에 있는 효소인 ‘아밀레이스’와 만나야 비로소 단당으로 잘라진다. 그때쯤 되면 우리는 입 안에서 단 맛을 느낄 수 있고 이 과정을 ‘당화’라고 부른다.


과일과 맥즙에 효모를 첨가하면 술이 되는 것과 달리 쌀은 이처럼 ‘당화’라는 한 가지 과정을 더 거쳐야 한다. 그래서 쌀로 술을 빚을 때 함께 등장하는 것이 ‘누룩’이다.




‘누룩’은 곰팡이와 효모, 젖산균 등 유익한 미생물이 잔뜩 모여 있는 집합소 같은 것이다. 대충 메주를 떠올리면 쉽다. 이 누룩 속 효소들이 우리 입속의 ‘아밀레이스’처럼 전분을 자르고, 동시에 잘라진 전분과 효모가 만나는 과정을 거치면서 알코올이 만들어진다. 문제는 어떤 성분들이 그 안에 자리 잡았는지 술이 완성될 때까지는 알 수 없다는 점이다.


게다가 메주를 떠올리면 알 수 있듯 누룩에서도 고유한 향이 난다. 술을 빚을 때 누룩의 함량이 높아질수록 술에 누룩의 영향이 깊게 배어든다. 그렇다면 누룩의 영향을 적게 받으면서도 잘 발효된 술을 얻을 수는 없을까?라는 질문이 안 나올 수가 없다.


오산양조장에서는 꽃을 첨가한 화주도 준비중이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이양주’, ‘삼양주’ 같은 '중양주' 빚기다. 중양주는 먼저 효모라는 미생물들을 대량으로 증식시킨 후(밑술) 재료를 덧붙이는 방식(덧술)으로 당화와 알코올 발효의 능력치를 최대한 끌어올린다. 그렇게 되면 많은 재료를 사용하면서도 소량의 누룩으로만 충분한 당화와 발효가 가능해진다.

발효조 안에서 술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처음 바탕이 되는 ‘밑술’에는 당연히 쌀과 물, 그리고 누룩이 들어간다. 밑술 속 누룩을 충분히 활동하게 만든 후 덧술을 붓는다. 덧술은 대개 쌀과 물만 사용되지만 제조 방법에 따라 누룩이 첨가되기도 한다. 온전히 제조자의 의지에 따라 재료가 첨가되는 것일 뿐 정해진 것은 없다.


밑술 한 번에 덧술 한 번이면 이양주, 덧술 두 번이면 삼양주가 된다(오양주, 십양주도 있다). 덧술을 하는 횟수가 늘수록 술맛이 깊고 부드러워진다고는 하지만 술 역시 음식이다. 만드는 사람의 기술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하얀까마귀'는 막걸리를 너무 많이 마셔서 하얗게 된 까마귀라는 컨셉 (오산양조장 홈페이지 펌)


이양주라고 소개한 ‘경기 막걸리’보다 삼양주라고 소개한 ‘하얀 까마귀’가 더 깊고 부드럽게 느껴진 것은 아니다. ‘경기 막걸리’가 쌀 특유의 단맛이 나는 맑은 맛의 막걸리라면 ‘하얀 까마귀’는 단맛이 강하고 묵직함이 느껴지는 술이다. ‘어떤 술이 좋다’라기보다는 ‘다른 면을 갖고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곳에서는 탁주, 약주, 증류주, 요리술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술의 종류도 그렇지만, 술이 만들어지는 과정도 다양합니다. 카키색 모자를 쓴 까마귀가 그려진 ‘하얀 까마귀’는 오산시 새마을 청년 연대와 MOU를 맺고 출시한 제품입니다. 우리 양조장은 오산의 다양한 단체들과 공동으로 작업하기도 하고 의견을 나누기도 합니다. 지역공동체 속에서 상생하는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오산 양조장의 다양한 술을 시음하면서 문득 한창 공론화되고 있는 ‘지방 소멸’ 문제가 떠올랐다. 고향을 떠나고 싶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어떻게든 고향에 남고 싶은 사람들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오산 양조장이야 말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맛있고 향기로울 방법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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