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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Nov 10. 2024

신토불이? 아니, 이것이 와인의 떼루아

- 영동 와이너리 <도란원>

'와인'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아마 이런 것이 떠오를 것이다.


투명한 잔 속에 찰랑이는 술과 넓은 포도밭, 커다란 통 안에서 으깨지는 포도, 지하에서 천천히 숙성되는 와인이 담긴 통들. 영화나 티브이 여행 프로그램 같은 것에서 한 번쯤은 봤음직한 장면이다.

입구부터 친절한 설명이...

조금 더 와인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빈티지'나 '떼루아'같은 단어가 생각날 수도 있다. '빈티지'란 그 와인을 빚을 때 사용한 포도가 수확된 해를, 떼루아란 그 포도가 자라난 토양이나 기후, 온도와 습도 등을 품은 고유한 특성을 나타내는 말이다. 말하자면 2021년 프랑스에서 만든 와인에는 2021년 프랑스의 햇살과 향기와 소리가 담겨 있고, 2019년 스페인산 와인에는 2019년 스페인을 스치고 지나갔던 바람과 오래된 흙이 합심해서 만들어낸 포도의 맛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이다. 낭만적이고 아름답다.


그렇다면 도대체 와인이 무엇이길래 그 모든 자연환경을 담았다고 칭송받는지 궁금해질 수밖에.

잎이 진 가지에는 달디 단 포도가 달려 있다

와인이란 무엇일까? 거칠게 말하자면 와인, 즉 포도주는 '포도를 압착하여 얻은 즙을 발효시킨 술'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포도주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있는 곳은 '고려사'다. 충렬왕이 원나라 황제에게 포도주를 받았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원나라는 몽고에서 발원하여 중앙아시아를 거쳐 유럽까지 팽창했던 나라다. 그러니 원나라의 황제가 고려의 왕에게 그리스산 와인을 주었다고 해도 고개를 끄덕일 법하다. 물론 글로 적힌 것이 전부이기 때문에 그것이 그리스 와인의 모양을 한 것이었는지 혹은 다른 형태였는지 알 길은 없다.


조선시대에도 와인 즉, 포도주에 대한 기록이 있다. 다만 조선시대 우리 땅에서 자라던 포도는 지금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품종보다 작은 '머루'에 가까운 것이었다. 조상들은 이것에 찹쌀과 누룩을 넣고 술을 빚었다. 우리가 아는 와인과는 좀 모양이 다르다.

아기자기한 도란원 내부

그렇다면 언제부터 우리가 아는 '와인'을 만들게 되었을까?


기분이 썩 좋지는 않지만 일제 강점기로 거슬러 가야 한다. 조선 총독부는 유럽의 포도나무를 들여와 마포에 포도원을 조성했다(『동아일보』1924.02.29. 「중앙시험소 중요한 시험사업」) 관에서 주도한 것뿐 아니라 민간에서도 이름난 포도원이 생겨난다. 포항에 자라집은 '미쯔와 포도원'이대표적이다. 이곳에서 지금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와인'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한때 27만 리터까지 생산하던 미쯔와 포도원은 태평양 전쟁과 같은 역사적 사건들과 관리 부족등의 이유로 퇴락하게 된다. 명맥이 끊어진 듯 보였던 와인 산업에 다시 훈풍이 불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다.

도란원의 술들

1965년 '양곡관리법'은 쌀로 술을 빚는 것을 금지했다. 곡식으로 술을 만들 수 없다면 다음 방법은 과일이다. 1970년대 경북 청하와 밀양에 동양맥주(지금의 OB맥주)가 포도원을 조성하면서 '마주앙'이라는 브랜드를 출시한다.


1987년 수입 와인 시장이 민간에 개방되면서 겨우 시작되었던 한국 와인 사업은 혹독한 시련에 직면한다. 다채롭고 가격 경쟁력이 있는 외국산 와인 앞에서 한국 와인들은 버틸 재간이 없었다.

안남락 대표가  와인 병입 과정을 시연했다


다시 한번 '한국형 와인'의 새 장이 시작된 것이 2010년 전후다. 정부의 주도로 포도특구가 지정되고 농림수산부 산하 기술연구들이 와인 생산에 적합한 포도를 개량해 내기 시작했다. 가장 발 빠르게 움직인 곳 중 하나가 영동군이다. 영동군청은 2008년부터 보조금을 지급하는 등의 육성 정책을 시작했다. 현재 영동군에만 36개의 와이너리가 존재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서울을 출발한 버스가 청주를 지나 이내 좁은 국도로 접어들었다. 어느덧 길 양쪽이 늘어선 포도나무들로 채워질 무렵 <도란원>에 도착했다.

지하 창고에서 숙성 중인 와인들

이미 차가워진 날씨 속에서도 아직 줄기에 매달려 달게 익어가는 포도를 볼 수 있었다. 최대한 수확기를 늦추면 포도 속 수분이 자연스럽게 날아가면서 당도가 높아진다. 높은 당도는 자연스러운 발효와 높은 알코올 도수를 만들어내는 일등 공신이다.


<도란원>은 2009년 만들어진 농가형 와이너리다. <도란원>의 역사는 한국의 와인 산업이 어떻게 성장했는지 알 수 있는 대표 서사 같은 것이다.


"지금 보시는 공간부터 시작했습니다. 그야말로 숟가락 하나부터 정성을 쏟았습니다. 처음부터 큰돈을 들여 이 와이너리를 만든 것이 아닙니다. 처음 와이너리를 만들 때 이곳이 포도 특구로 지정되면서 약간의 자부담을 하면 보조금을 지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와인을 만들고 팔아서 옆 건물을 짓고 또 시간이 지나 체험장을 만들고 이렇게 된 것이 여러분이 보시는 이 와이너리입니다. 천천히 둘러보시고 궁금한 것은 무엇이든지 물어보셔도 됩니다."


와인색 바지를 입은 도란원의 안남락 대표가 입구에서 우리를 맞아들이며 이렇게 말했다. '사토 미소'시리즈로 이름 붙은 술들이 진열된 공간이나 체험장, 식사를 위한 공간 하나에도 세심한 손길이 지나갔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전시된 술병들 옆으로 '대통령 만찬주' 선정 연혁과 함께 '대한민국 주류 대상'을 비롯해 그간 받았던 상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와인 저장고에서 숙성중인 증류주들

<도란원>에서 레드 와인을 빚을 때 사용하는 포도 품종은 '캠벨'이다. 마트에서 흔히 찾을 수 있는 품종이다. 농촌진흥청에서 와인 생산을 위해 육성한 '청수'를 이용해서는 화이트 와인을 만든다. 그 외에도 산머루, 자두, 복숭아 등 우리 땅에서 나는 어떤 과일도 술 안에 녹여낸다. 우리의 떼루아가 고스란히 담겼다고 할 수 있다.


처음 시음한 것은 '사토미소 로제 스위트 와인'이었다. 캠벨 특유의 달콤한 맛이 특징이다. 익숙한 포도향과 복숭아, 장미 향이 났다. 캠벨 품종이 낼 수 있는 맛이 이런 것일까 생각할 즈음 '사토 미소 프리미엄 드라이 와인'이 앞에 놓였다. 손을 들고 빈 병을 청해 라벨에 적힌 재료를 다시 찾았을 정도로 드라이하지만 부드러운, 훌륭한 와인이었다. 일행들과 연신 엄지 손가락을 세웠다.

발효통

<도란원>의 술들은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곳의 증류주 제목은 안남락 대표의 '락'에서 가져왔다. '사토미소 킹 레드팬츠'에는 안남락 대표의 이미지가 그려져 있다. '사토미소 웨딩'은 자녀의 결혼을 기념해 출시한 와인이다. 자두의 맛처럼 달달한 결혼 생활이 이어지길 바라는 부모의 마음이 담겨 있다. 그야말로 농가형 와이너리만이 만들 수 있는 작고 아름다운 이야기다.


<도란원>에는 와인을 만드는 공간 외에도 체험장과 식당, '찾아가는 양조장'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우리처럼 찾아오는 관람객들을 위한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지하에는 거대한 와인 숙성창고가 있다. 와인이 담겨 있는 통뿐 아니라 오크통도 즐비하다.


"이 안은 겨울에도 10도 아래로 내려가지 않고 여름에는 20도 이상 올라가지 않아요. 저기 보시는 오크통에는 자두로 만든 증류주와 포도로 만든 증류주 두 종류가 숙성되고 있습니다. 이쪽에 있는 병들은 전통적인 샴페인 방식으로 스파클링 와인이 만들어지는 과정입니다. 지금 한창 숙성 중입니다."


이렇듯 소소하고 작은 이야기만 있는 와이너리인가 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 <도란원>은 현재 국내 와이너리 중 가장 많은 종류의 와인을 생산한다. 그렇게 많은 와인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가족이 농사를 짓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많은 을 근처 농가에서 수매한다. 잘되는 와이너리 하나가 인근 농가들의 안정적인 판로가 되는 것이다.

준비해주신 안주와 함께 시음을..
"많이 공부하고 연구했습니다. 외국에 나가서 많이 배웠고,  여러 번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어요. 그래서 저는 어떤 질문에도 막힘없이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노하우가 공개되는 것은 두렵지 않아요. 이 이야기를 듣고 와인에 대해 더 많이 궁금해지고 맛보고 싶고, 만들고 싶어 지길 바랍니다."


넉넉한 시골 인심처럼 인자하게 웃는 얼굴의 안남락 대표가 말했다. 우리의 떼루아를 녹여낸 와인, 나는 <도란원>의 와인을 이렇게 정의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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