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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현 May 06. 2017

비선형 성장 - 직장 내 전략적 포지션

기회는 위치 선정에서 온다

한 때 (지금은 아니라는 뜻으로) 나는 성장에 대한 집착 했다. 회사라는 곳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여느 신입사원들이 그러는 것처럼 조직에서의 성공 스토리를 마음에 품었다. 더욱이 사회에 나오기 전부터 ‘출세’를 중요한 가치로 학습받았던 터라 당시 나의 우선순위 리스트 상단 어딘가에는 ‘성장’이 있었다. 철부지 같았던 직장생활 초기에는 열심히 노력만 하면 성장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인 줄로만 알았다. 그때까지는 노력에 따른 결과가 정직하게 나온다고 (순진하게도) 믿어왔으니까. 밤새워 제품 릴리즈를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자청했다. 사흘에 한번 밤을 새우는 일정도 마다하지 않았다. 일이 늘어갈수록 삶은 말라갔다. 아니, 함께 생활하는 모든 사람이 일에만 매달리다 보니 일 이외의 것이 내 인생에 필요한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장은 더디게 이루어졌다. 스스로 느끼는 성장에 대한 느낌은 막연했고 업무 실적은 승진을 눈앞에 둔 선배들에게 몰아지기 마련이었다.


점차 혼란스러워졌다. 노력과 결과가 동기화되지 않는 상황을 난생처음 목도하면서 말이다. 몇몇 선배들이 실적을 독식하다시피 하는 상황에 의아했다. 이러한 ‘비동기’는 왜 벌어지는지 궁금했다. 나의 노력은 성장이라는 보상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 대신 조직을 위한 희생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3~4년이 지나자 반복되는 상황에 이따금 억울함을 넘어 무력감을 느끼곤 했다. 희생이라는 감정은 반대급부로 보상심리를 불러온다. 하지만 적절한 보상을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보상심리는 피해 의식으로 발전한다.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는데 지금 내 상황은 왜 나아지지 않는가?’라는 질문이 마음속에 맴돌기 시작한다.


개선의 여지가 어딘가에는 있을 텐데, 그것을 찾지 못하니 그저 묵묵히 노력할 수밖에. 그 노력은 그것이 상황을 개선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보다는 다른 방도를 찾지 못해서 지속하는 ‘우울증 치료제’ 같은 것이었다.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노력하는 자만이 성공할 수 있다고 하니까.’라는 생각을 되뇌며 우을 감과 불안감을 떨쳐냈다. 도피처였던 셈이다. 첫 직장을 다니는 사 년 동안 네댓 개의 프로젝트에 참여했다는 이력서 글귀 말고는 건진 것이 없는 것 같았다. 스스로의 성장을 체감할 기회가 없었다. 조직의 가장 아래 분업의 톱니바퀴로 사 년을 살았을 뿐이었다.



새로이 옮긴 일터에서 한 사람을 만났다. 독특한 사람이었다. 흔히 말하는 성실한 사람은 아니었는데, 유독 조직 내에서 돋보였다. 남들보다 더 적은 시간을 회사에서 보냄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어찌나 반짝거리던지 조직 전체의 기대와 격려가 그에게 쏠렸다.


많은 직장인들이 자신에게 일이 주어지면 가장 먼저 하는 것은 그 일을 하는 것이다. 보고서를 써야 한다면 보고서를 쓰기 시작하고, 코딩을 해야 하는 사람은 에디터를 열어 코드를 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는 좀 달랐다. 일을 맡게 되면,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 일이 왜 필요한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말이다. 그는 그 생각의 과정을 혼자 하지 않았다. 나를 포함한 주위 사람들과 대화했다. 의견을 물어보고 정보를 얻는다. 그가 일하는 모습을 보면, 열심히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사람들 사이를 유유히 거닐고 있는 도인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링컨이 이야기한 ‘내게 나무를 베기 위한 시간이 한 시간 주어진다면, 45분 동안은 도끼 날을 가는데 쓰겠다.’에 딱 맞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일을 배우면서 나의 직장 생활은 방향을 바꾸었다. 이유와 목표, 그리고 목적을 염두하고 하는 일에는 시행착오도, 과로도, 피해의식도 없었다. 지향점을 정확히 조준하고 응축한 힘을 분출시킬 때, 일은 점점 즐거워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성장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성장이라는 것의 정의가 무엇이냐? 성장은 일에만 있는 것이냐?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성장이라는 것은 나의 기술이 성장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나의 시야, 사고, 안목, 철학 이 모든 것의 폭이 넓어지는 것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성장은 일만 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생각이다. 끊임없이 일의 의미와 방향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래서 성장은 어려운 것이다.


성장은 두 가지 측면이 있다. 방금 이야기한 내적 성장, 그리고 보상과 직급 등으로 나타나는 외적인 성장이 있다. 이들 모두가 중요하다. 아무리 내실 있는 성장을 이룬다 해도 보상이 없으면 힘들기 마련이다. 안 그래도 내적 성장 없이 보상만 챙기려는 사람이 도처에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지 않겠는가?


하지만 너무 조바심 내지 마라. 노력이 지속될 때 내적 성장 선형적으로 이뤄지지만 외적 성장은 비선형적으로 이루어진다. 나의 직장 생활 20년 동안 내가 승진하고 연봉이 오른 것은 단 두 사람의 리더 때문이었다. 내 성장의 8할은 단 두 사람과 보낸 4년 동안 이루어진 것이다. 나뿐 만이 아니다. 외적 성장이 선형적으로 이루어지는 사람은 잘 보지 못했다. 노력과 성장이 비례하지 않는다니 뭔가 불합리한 것 같긴 하지만, 나와 잘 맞는 사람을 만났을 때 지금 것 쌓아왔던 역량들이 밖으로 뿜어져 나오다고 생각하면 된다.


앞으로 직장 생활할 때도 잊지 말길 바란다. 일을 열심히 하는 것만큼이나 나와 잘 맞는 사람을 찾아는 데에도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길 바란다. 회사 내에서의 입지를 전략적인 측면에서 검토해 보라. 나와 맞는 리더를 찾고 내가 능력을 펼칠 수 있는 조직에 들어가는 것이 열심히 일하는 것보다 중요할 때가 있다. 이건 꼭 외적 성장뿐만 아니라 내적 성장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다.



한 번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너무 당연한 이야기 아니었던가. 내가 노력하는 것을 알아봐 주고 나의 성장을 알아봐 줄 사람을 만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함 것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나의 현재 상태를 알아봐 주기만을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우리가 상식처럼 알고 있는 '열심히 하면 좋은 결과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부 맞는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좀 심하게 말하면 열심히라는 단어는 많은 직장인들에게 도피처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자신이 커리어 혹은 인생이 향하는 방향이 어디인지 알지 못하는 불안함을 '열심히'라는 단어로 희석하려는 것은 아닌가 싶다. 말하자면 ‘근면을 통한 합리화’이다. 근면한 삶이 답을 가져다주지 않을 것임에도 (또 근면이 언제나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안한 마음을 달래려면 어쩔 수 없이 근면함을 내보여야 한다. 또 이러한 근면함은 조직에게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어필하기 위해서, 또 자기 스스로를 설득하기 위해서도 요긴하게 활용된다.


근면함 보다는 전략을 쫓자. 일을 기획하고 실행함에 있어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찾는데 대부분의 리소스를 투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전략은 그것의 가치를 인정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 빛을 발한다. 회사는 맡은 바 일을 주어진 위치에서 묵묵히 해내는 사람들의 가치를 최고라 이야기하고는 한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자. 근면하게 맡은 바 일을 묵묵히 하는 사람들의 삶은 어떠한지. 어쩌면 자신이 빛날 수 있는 전략적 포지션을 찾는 것이 근면성 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아닐까 생각을 해본다. (물론 이 두 가치가 양자택일의 것은 아닐 것이다.) 기회는 적절한 위치 선정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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