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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 Nov 17. 2019

분노하는 평화주의자

2005년 일본 프라이드 불꽃 하이킥 크로캅 대 얼음파운딩 효도르 결승전이 있는 날, 맥주 한 캔과 안주를 준비하고 기다렸다. 일본에서 치르는 격투스포츠가 국내에서도 연일 대서특필하고 있었다. 극장에서 라이브로 상영할 정도로 빅 이벤트였다. 스포츠는 1도 관심 없었던 나는 격투기는 열광했고 크로캅의 팬이었다. 


경기가 시작되고 심장이 떨릴 정도로 흥분상태가 되었다. 두 손을 모으며 크로캅의 하이킥이 효도르의 안면을 강타하기를 빌었다. 1라운드는 팽팽한 접전이었고 크로캅의 잽이 효도르의 안면을 타격하고 흔들렸다. 벌떡 일어서서 크로캅의 승리를 확신했다.



역시 격투기 제왕답게 효도르는 흔들리지 않고 크로캅을 얼음파운딩으로 승점을 얻어 승리했다. 졌지만 잘 싸운 크로캅과 최선을 다한 효도르를 보면서 생각했다. ‘역시. 저게 남자다.’ 땀과 피가 낭자한 남자들의 세계에 열광했다. 유독 한국에서 사랑받은 크로캅은 내가 유일하게 좋아했던 파이터였다. 


스포츠 경기를 이렇게 가슴 졸이며 본 것은 처음이었다. 혈기왕성한 젊은 남자들 사이에서 스포츠는 하나로 묶어주는 주제다. 운동을 잘하면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인기를 얻을 수도 있다. 10, 20대는 육체적 능력은 남자다움의 상징인데, 운동신경이라고는 1도 없어서 내 육체를 저주받은 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시합이 끝나고 흥분을 가라앉았다. 문득 폭력을 그렇게 싫어했는데 왜 이렇게 흥분하지? 상황을 가져온 것뿐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난 여전히 격투기를 즐겨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폭력과 승패다. 


나는 억압적인 학교 분위기와 폭력적인 남자들 사이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강한 남성성이 두렵고 싫었다그런데 격투기를 좋아한다? 아이러니하다. 왜 이렇지? 이 화두는 중요한 키워드가 되었다. 꽤 긴 시간을 고민만 했다. 어느 날 영화를 보러 가기 위해 옷장을 열고 가죽재킷과 청바지를 입고 슈퍼맨을 보러 갔다.



난 유독 가죽재킷과 청바지를 좋아했고, 맨시리즈를 즐겨보며 시원하게 때려 부수는 액션을 좋아했다. 지독한 평화주의자인 줄 알았던 내 모습과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 화를 참는 성격 탓에 스트레스를 영화로 풀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말끔하게 해소될까? 전혀 안된다. 누적된 분노는 차곡차곡 쌓여서 터질 날을 기다린다.  


연애 실패가 분출구가 되었다. 쌓였던 분노가 실연으로 터지고 방 안에서 지내게 되었다. 은둔형 외톨이는 자기 자신을 향해 분노하는 평화주의자들이다. 한정된 공간에서 자기 자신을 가두고 분노하고 저주한다. 자기감정에 솔직한 사람보다 감추는 유형이 히키코모리가 될 가능성이 높다. 


천신만고 끝에 방에서 나와서 노쇠한 육체와 정신은 쉽게 깨졌다. 불쑥 다시 방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그럴 때마다 정신을 가다듬고 알바를 했다. 돈이 생기면 가죽재킷과 프리미엄 청바지에 꽂혔다. 30,40만 원 하는 청바지를 사고 고가의 가죽재킷도 샀다. 두 가지 아이템은 강한 남성의 이미지로 준다. 왜 그렇게 열광했는지 몰랐다. 


약한 남성의 무의식적 선택이었다. 이렇게 나를 포장하고 강한 남자인 척했다. 사실 일을 하면서 겉으로 웃고 있지만 내면은 분노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작은 지적에도 쉽게 상처 받고 일을 그만두는 수동적인 공격 패턴이었다. 일을 그만두는 것으로 내 분노를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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