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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 Nov 17. 2019

가족을 버려야 산다

최고급 호텔 웨이터로 일을 할 때였다. 탈의실에서 선배 웨이터가 나를 힐끔 보더니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너 웨이터 할 자격이 없어. 거울로 니 꼴을 다시 봐.”

“네? 죄송합니다.”


나는 뭐가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어서 고개를 숙였다. 덩치가 산만한 근육질의 선배 웨이터는 무서운 얼굴로 나를 노려보며 대기실을 나갔다. 어떤 잘못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말하지도 않고 무작정 혼을 내니 억울했다. 그 날 일을 마치고 어머니한테 억울한 심정을 얘기하고, 세수하려고 화장실 거울을 보니 아차 싶었다. 얼굴에 수염이 깨끗이 깎지 않았다. 그때서야 내가 수염을 깔끔하게 면도하지 않고 일터에 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참고로 웨이터가 얼굴을 단정히 하지 않으면 퇴사감이다.


잘못을 했지만 그 선배의 말에 상처를 받고 몇 달 만에 일을 그만두었다. 작은 상처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철없는 어른 아이였다. 그렇게 백수가 된 나를 부모님은 다시 받아주시고 빈둥거리는 한량이 되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일상다반사로 일어나는 인간관계의 갈등을 견디지 못하고 입사와 퇴사를 반복했다.


 




성인의 응석을 다 받아주었던 부모님의 사랑이 안주하는 습관으로 고착화되기 시작했다. 이는 마마보이와는 다르다. 상황판단과 결정을 부모에게 의지하는 것이 마마보이라면 은둔형 외톨이는 그냥 판단을 안 하는 것이다. 특히 부모가 경제적인 부담까지 해주게 되면 은둔하기 쉬운 조건이 된다. 처음에는 한 달 그리고 두 달 세 번째 일 년을 백수로 지내면서 점점 밥벌이하지 않는 게 편안하다고 인지하게 되었다. 어차피 먹여주고 재워주니까.


독립적인 인간이 되기 위한 최우선 과제는 경제적 독립인데 이걸 하지 않으니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나의 젊은 시절은 일터와 방구석을 반복하니 사회경력이 쌓이지가 않았다. 회사를 취업하기 위한 경력사항이 방해가 되었다. ‘당신은 진득하게 한 곳에 오래 있지 못하는 성격인가 보군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평가란에 항상 적혀있는 ‘의지박약’ 아... 선생님들이 나를 제대로 봤나 보다. 


photo by 사다향


내 성향이 사적 공간을 중요시했지만 그 공간의 안전망은 부모의 품 안이었다. 한국의 특수성을 고려하더라도 대학을 졸업하면 집을 나와야 하는 노력이라도 해야 하는데 하지 않았다. 세상을 등지고 숨어 지내는 습관은 달콤하고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운명은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경제적 타격으로 부모님과 나는 강제로 분리되는 환경이 돼버렸다. 타의에 의해 분리독립선언을 하게 만들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운명은 인간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애착하는 것을 버리게 만드는 환경에 놓는다. 버릴 것인가 말 것인가의 테스트에서의 선택이 고뇌하고 갈등한다. 스토리텔링에서 주인공의 중요한 갈등 지점은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나는 가족을 버리기로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족에 의지하는 나약한 나를 버리기로 했다. 우선 부모님과 나의 애착 고리를 끊기로 결심했다.


“얘야. 밥은 잘 먹고 다니니?”

“항상 차조심하고...”

“돈은 넉넉하고..”


지금도 다 큰 아들을 걱정하는 부모님의 마음이야 십분 이해할 수 있지만 철없는 자식을 끊임없이 받아주는 이것이 나와 가족들을 불행하게 만든 원인이었다. 이것을 수십 년을 흘러 알게 되다니. 언뜻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지만 습관은 알면서도 저지르는 도박중독과도 같았다. 은둔형 외톨이를 빠져나오는 기준은 바로 부모님과의 애착 고리를 끊느냐 마느냐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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