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웬디>의 선택
영화 <웬디>의 선택
돌아가야겠다. 어떤 진심에 닿기 위해 본질의 핵으로 나있는 지름길로 달려가는 방법이 있지만, 이 영화에 접근하려는 내 경우에는 둘레를 따라 걷는 에움길을 택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아래로 깊이 내려가기 전에 먼저 표면, 즉 벤 자이틀린 감독이 선택한 영화의 ‘설정’에 먼저 의문을 던지려 한다. 원작인 피터팬이 애니메이션이었던 것과 달리 <웬디>는 많은 부분이 사실적인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화에서 아주 드물게 CG로 등장한 ‘어머니’(거대한 물고기 형상의 생명체)를 제외하고 많은 부분이 실제 존재하는 현실 세계의 일부인데(이건 인물만 아니라, 공간도 마찬가지다. 환상의 장소인 ‘네버랜드’의 촬영 장소는 카리브해의 화산섬 몬트세랫이다), 벤 자이틀린 감독은 왜 영화에서 환상의 영역을 제거한 걸까. 이 선택에는 그가 표현하고 싶은 어떤 진실의 단면 하나가 숨어있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을 나는 가졌다.
질문의 답을 찾으려 한번 더 돌아가자. 네버랜드에서 피터(야슈아 막)는 영원히 나이를 먹지 않고서 6살의 외형을 지니고 있는데, 그곳에선 피터를 따라 도착한 웬디(데빈 프랑스)와 쌍둥이 남자 형제인 더글라스(게이지 나퀸), 제임스(개빈 나퀸)도 마찬가지로 나이를 먹지 않는다. 네버랜드에는 시간이 흘러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 법칙에서 소외되는 경우가 있어서, 어떤 아이들은 노인의 모습을 띄고 있다. 그런 아이들은 비통이나 슬픔의 정서를 느꼈기 때문에 늙게 되었다고 극 중 피터는 웬디에게 설명했다. <웬디>의 제작노트에서 벤 자이틀린 감독은 “사람은 누구나 좋든 싫든 성장하고 변화하게 되며, 이때 수많은 실패를 거듭하며 어린 시절 품었던 확신들은 서서히 사라지게 된다”라고 말했는데, 극 중 후크 선장의 정체가 쌍둥이 형제인 더글라스의 상실을 견디지 못했던 제임스라는 점이, 무언가를 시사하는 것 같았다. 성장은 성숙이어서, 나이를 먹어가는 것은 곧 슬픔을 겪는다는 것, 그 슬픔에 잠식되면 나의 원형(어린시절)이 조금 훼손된다는 것. 요컨대 이 영화에서 악은 후크 선장이 아니라, 우리를 성숙하게 만드는 ‘시간’ 그 자체로 보인다.
그러므로 피터와 웬디는 우리를 성숙하게 만드는 시간을 대적해야 한다. 나의 본질이 사라지지 않기 위하여. 나의 원형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나는 결코 성장하면 안 된다. 내가 나로 살기 위해서. 내가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은 사회적 의례를 거치면서 이리저리 깎이며 조각된 인위적인 형태가 아니라, 나를 치장한 그 모든 거짓의 외피를 벗어던진 모습이니. <웬디>의 피터처럼 내 손을 잡고 이리저리 끌고가던 벤 자이틀린 감독의 생각을 따라가다가, 나는 그만 손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이건 이미 낡아버린 ‘진정성’에 관한 논의가 아닌가. 이렇게 접근하는 것이 영화 속 캐릭터의 입체성을 납작하게 만드는 다소 무례한 방법인 줄 알지만, 나는 떠오르는 생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네버랜드에서 영원히 나이를 먹지 않으며, 시간의 흐름과 늙어감에 대항하는 피터는 ‘진정한 나’를 이루고 싶은 이념의 표상 그 자체로 보인다.
내가 놓은 손을 다시 잡은 건 웬디 때문인데, 그가 피터와 다른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그 선택을 통해 영화는 조금의 깊이를 확보한 것처럼 느껴졌다. 다른 삶(진정함을 추구하지 않는 삶)도 있다는 것을 긍정하기 때문에. 피터는 성장을 포기했지만 웬디는 성숙을 택하고 그는 네버랜드에서 나왔다. 시간에 대항하여 시간 없이 사는 태도 말고, 시간과 함께 사는 법을 선택한 것이다. 내게 시간이 축적되어서 앞으론 비록 ‘진정한’ 나로 살지 못하겠지만, 그런 나 역시도 다른 누구도 아닌 진정한 ‘나’라는 것을 <웬디>를 통해 웬디는 우리에게 사려 깊게 말을 건넨다. 이쯤에서 첫 단락에서 물었던 질문에 관한 답을 시도해볼까. 벤 자이틀린 감독이 공간 배경으로 환상적인 장소가 아닌 마치 현실세계처럼 보이는 자연적, 사실적인 공간을 선택한 것은 이 이야기는 어느 이야기보다 우리 삶의 성장에 관한 사실적인 이야기라서 그런 건 아닐까. 이 대답을 하기 위해 시간이 흘렀고 많이도 돌아왔다. 그러나 이 길이 낯설지만은 않은 건, 우리도 이런 방식으로 지금껏 성장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2021. 7. 5.)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소중한 영화를 관람하고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