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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식 Mar 24. 2021

우리 손에 쥐어준 희망의 조짐

영화 <미나리>

우리 손에 쥐어준 희망의 조짐

영화 <미나리>




     이런 영화를 좋아한다. 성취의 환희와 파멸의 비애를 지나치게 과시하지 않는 영화를. 그 강력한 자장에 의지하여 관객의 감정을 영화가 지향하는 어떤 곳으로 이끌고 가려하지 않는 영화를. 성공과 몰락에 이르기 전의 어느 지점에서 멈추고 그 자리에서 어떤 조짐, 기미만이 희미하게 사방으로 번지는 영화를. <미나리>는 바로 그 지점에서 정확히 멈췄다. 어떤 멈춤인가. 영화에서 제이콥(스티븐 연)이 끝내 무언가를 성취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반대로 몰락의 절벽에서 온 가족이 하강하지도 않는다. 사려 깊은 이 영화에서 성공과 몰락은 희미한 가능성으로만 존재한다. 멈춤은 곧 (기미의) 나아감인데, <미나리>는 이런 식으로 어떤 조짐의 상서로운 기운만이 관객에게 나아가도록 가만히 멈춰있었다.


   그러므로 <미나리>에서 중요한 것은 서사의 고전적인 진행방식이 아니라, 한 인물이 자신의 생애의 어떤 시점을 통과해온 시간을 떠올리는 방식일 것이다. (정이삭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자전적인 경험 80% 이상이 이 영화에 담겨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감독의 페르소나 캐릭터가 데이빗(앨런 킴)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을 텐데, 영화는 어리고 섬약한 데이빗의 시선이 투영된 시점쇼트를 자주 보여줬다. 영화의 첫 장면, 데이빗은 뒷자리에서 어딘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전방을 응시한다. 데이빗의 앞에는 불안한 눈길을 사방으로 건네며 운전하던 엄마의 모습이 룸미러에 비치고. 데이빗의 시점 쇼트는 이 것 말고도 여러 번 등장한다. (‘그러다가 쟤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그래?’라고 말하는 엄마를 자동차 뒷자리의 대각선 위치에서 본다든가, 자신의 몸상태를 걱정하는 엄마를 집 밖의 창문 너머로 본다든가.)



영화 <미나리>



   내게 인상적인 것은 이것인데, <미나리>에서 독점적인 시점쇼트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데이빗 외에    있던 것이다. 바로 순자(윤여정). 영화의 초반부에서 아칸소의 가든 오브 에덴에 당도한 첫날밤, 가족 모두 거실에 나란히 누워 잠을 청하자고 했던 제이콥(스티븐 ) 요청은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성취되는데,  쇼트가 누구의 시점인지는 곧이어 연결되는 쇼트를 통해 우리는   있다. 순자가 의자에 걸터앉은 가족을 내려다보고 있던 . 주로 어린 제이콥의 시점으로 보느라 관객은 자주 낮은 자리에서 높은 것을 올려다봤는데,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거의 처음으로 아주 약간의 부감적인 시선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는 쇼트가  것이다. <미나리> 마지막은  (제이콥이 아니고, 모니카도 아닌) 순자의 시점이 되어야 했는가.


   말하자면 <미나리>는 데이빗의 시선으로 출발해 순자의 시선에 당도한다고 할 수 있을 텐데, 이 점에서 정이삭 감독은 자신의 페르소나를 데이빗만이 아니라 순자에게도 둔 것은 아닐까, 나는 추측했다. (순자는 처음 데이빗과 인사했을 때, ‘얘가 날 닮았다는 그 아이구나’라고 말했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와, 왜 순자여야 하는가. 영화에서 ‘미나리’의 본령이 희망이라고 생각했을 때(‘미나리는 어디서든 잘 자라’), 그 미나리를 한국에서 가져와 이곳에 심은 사람이 순자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순자는 우리 가족에게 희망의 씨를 심은 첫 농부인 셈이다. 이 일은 인간에게 불현듯 찾아오는 축복이 그런 것처럼 우리의 의지나 노력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어서, 순자도 의도적인 목적의식을 갖고 미나리를 가져와 심은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정이삭 감독도 그것을 알았을 것이고. 바로 그래서, 그는 순자의 비의도적인 축복을 의도적으로 기렸다.


   요컨대 <미나리>는 데이빗의 시선과 순자의 시선 사이를 진자운동 하듯 오가는데, 어쩌면 이건 우리가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과 관련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우리가 과거를 기억하는 위치, 어떤 태도와 같은 것. 당시의 나는 모든 것이 낯설고 두려워 늘 초조했지만(데이빗), 지금의 나는 그때를 어느 정도 관조할 수 있다(순자). 어쩌면 우리는 사는 동안 이 둘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면서,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아주 가까스로 조금 자라게 되는 것인지도. 



영화 <미나리>



   아직 이른 새벽, 나란히 누운 온 가족이 깊이 잠에 든 모습을 내려다보는 순자의 표정은 어딘가 초연한 구석이 있다. 영화 초반부에서 데이빗의 눈빛에 위태로운 감정이 섞여있던 것과는 대비되는 정서다. 그녀는 그 순간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갖은 일이 그녀를 지나쳐가며 얼굴 곳곳으로 움푹 새겨놓은, 마치 ‘인생의 고랑’ 같은 주름을 숨기지 않으면서 그 순간 그녀의 정서는 무엇에 가까웠던 걸까. 애처로움일까, 안쓰러움일까, 애틋함일까. 그러나 그녀는 말없이 응시할 뿐이다. 모니카(한예리)와 폴(윌 패튼)의 간절한 기도에 침묵하며 세상을 내려다보는 신의 응시가 그런 것처럼.


   그러나 때로 신의 응답은 명료한 말의 형식이기보다 어렴풋한 희망의 형식으로 다가오기도 한다고, 영화는 믿는다. 신은 우리 손에 희망의 조짐만을 쥐어주지만, 우리는 이 작고 고요한 빛의 의지하여 아직은 막막한 미지의 세계로 걸어가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두려울지언정 그만둘 수는 없고, 힘들지언정 벗어던질 수 없다. 제이콥에게 아칸소 농장이 그랬고, 폴에게 자신이 짊어진 십자가가 그랬다. 모든 것이 허탈하게 불타 없어질지라도 우리는 그 폐허의 자리에 다시 새로운 미나리를 심을 것이다. 영원히 시작하는 마음으로.




저녁이 안뜰에서 고요할 때,

그대의 책갈피로부터 아침이 떠오를 것이다.

그대의 겨울은 내 여름의 그늘이 될 것이고

그대의 빛은 내 그늘의 영광이 될 것이다.

그래도 우리 함께 계속해 나아가자.   

- 보르헤스, ‘라파엘 칸시노스-아센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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