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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식 Jul 07. 2021

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기

영화 <트립 투 그리스>의 여행과 탈여행

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기

영화 <트립 투 그리스>



 덕분이다. 그리스에 가지 않고도 그리스를 관광할 수 있던 건. <트립 투 그리스>의 제작진께 감사를 표하며 글을 시작해볼까. “여행하지 않는 곳에 대해 말하는 법”에서 피에르 바야르는 ‘탈여행’이라는 단어를 소개해주는데 내용은 이렇다. 나 대신 타자가 다녀온 여행의 흔적(사진, 영상, 메모 등)을 보면서 나는 그 장소에 대한 정확한 통찰을 가질 수 있다는 것. 어째서 그럴 수 있는가. 타자 때문이다. 내가 가지 않았으므로 나는 타자(가 가져온 기록물)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는 동안 나는 무의식적으로 타자가 여행에서 놓쳤을 어떤 것(말하지 않은 어떤 것)을 상상력을 사용해 복원하려는 시도를 할 것이고, 그것이 그 여행을 본질적으로 재구성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자기 속에 타자의 관념을 지니는 것, 그 대상이 장소일 경우 그것은 전통적으로 여행과 결합된 경험-전능의 환상 속에서 미지의 세계를 지배하고자 하는-에 대립되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정신을 풍요롭게 해주는 이 경험을 우리는 탈여행이라 명명할 수 있을 터.”(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는 법, 피에르 바야르) 바야르 식으로 말하자면, <트립 투 그리스>를 보면서 우리는 그리스를 탈여행의 방식으로 여행한 셈이다. 그러니 어찌 고마워하지 않을 수가.


  탈여행의 방식으로 여행한 나라는 그리스만 있지 않다. 스티브 쿠건과 롭 브라이든은 2010년 <트립 투 잉글랜드>부터 여행의 파트너가 되어 2014년 <트립 투 이탈리아>와 2018년 <트립 투 스페인>을 경유해 2020년(개봉연도) <트립 투 그리스>에 이르렀는데, 그들과 함께 한 우리도 차례로 잉글랜드,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고 그리스를 여권 없이 다녀온 것이다. <트립 투 그리스>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시리즈를 제작하지 않는다 하니, 탈여행의 방식으로 그들과 같이 여행하진 못하겠지만 지금까지 우리 안에 ‘타자의 관념’이 잠시나마 머물렀다는 것 자체가 뜻깊다. <트립 투 …> 시리즈는 영화마다 주된 소재가 되는 인물을 기준점에 두고 방사형으로 뻗어나가며 여행을 진행해나가는데, 이번 그리스에서 그 인물은 오디세우스였다. “우리 거의 10년간 이렇게 여행했잖아. 그럼 거시적인 의미에서 우리도 10년간 오디세이를 쓴 거라고.” 이렇게 말하는 롭 브라이든의 대사는 <트립 투 …> 시리즈의 전언처럼 들린다. 그래서인지, 이 시리즈의 마지막 여행지가 그리스라는 것, 영화의 소재가 되는 인물이 고향으로 귀환하는 내용인 오디세우스의 주인공 오디세이라는 점은 곱씹어 생각할 만하다. 이제는 일상이다.



영화 <트립 투 그리스>



   일상으로의 귀환.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정서적으로 크게 동요하지 않는 롭 브라이든과 같은 류의 사람이 있는가 하면, 권태와 우울에 일상이 오염된 스티브 쿠건 같은 부류의 인물도 있다. 후자에 가까운 나는 그래서 여행을 떠올리는 것으로도 가슴 떨리고 만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한 말은 아니지만, 샤를 보들레르는 이렇게 적은 적 있다. “그러나 진정한 여행자들은 오직 떠나기 위해 떠나는 사람들 / 마음도 가볍게 풍선처럼 / 주어진 숙명을 빠져나가지 못하면서 / 까닭도 모른 채 늘 “가자!”하고 외친다”(악의 꽃, ‘여행, 샤를 보들레르’) ‘떠나기 위해 떠나는 사람들’. 떠나야만 하는 것은 어째서 그들의 숙명이 되고 마는 걸까. ‘파리의 우울’에 실려있는 보들레르의 시 한 편을 더 소개한다. “이 삶은 하나의 병원, 환자들은 저마다 침대를 바꾸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중략) 마침내 내 혼은 폭발하여, 슬기롭게도 나에게 외친다. “어디라도 괜찮다! 어디라도 괜찮다! 이 세상 밖이기만 하다면!”(‘파리의 우울’, ‘Any Where Out of the World', 샤를 보들레르) ‘떠난다’(여행)라는 욕망의 극한을 끈기있게 밀고 나가면 그건 결국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이탈, 또는 ‘죽음충동’(프로이트)에 가까운 개념이 되지 않을까. 여기에 이르자 마음속 어딘가가 서늘해졌다.


   이렇게 심각해지지 않고 여행에 관해 말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을까. 바야르의 ‘탈여행’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보면 어떨까. 그러니까, ‘내 안에 타자의 관념을 지니는 것, 그렇게 해서 내 삶을 재구성해 보는 것’. 이런 방법으로 나는 내가 아닌 방식으로 나를 여행할 수 있지 않을까. 프랑스 시인의 시를 가져왔으니, 이번에는 독일 시인의 시를 가져오자.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고대 아폴로의 토르소’라는 시다. 


거기 두 개의 눈망울이 무르익고 있던

아폴로의 엄청난 머리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토르소는 지금도 촛대처럼 불타고 있다. 

거기에는 그의 사물을 보는 눈이 틀어박인 채,


(중략)


그 모든 가장자리에서마다 마치 별처럼

빛이 비치는 일도 없으리라. 이 토르소에는 너를 바라보지 않는

부분이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너는 너의 삶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고대 아폴로의 토르소’



영화 <트립 투 그리스>


   ‘토르소’란, 머리와 사지 없이 몸통만 있는 조각을 가리키는데, 릴케는 머리가 없어서 눈도 없는 이 조각이 역설적으로 눈이 없으므로 자신을 주시하는 것처럼 느꼈다. 머리가 없으니 입도 없을 터인데, 이번에도 그는 토르소의 말을 들었다. ‘너는 너의 삶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릴케의 시에서 나는 ‘탈여행’의 자세와 방향에 대해 생각한다. 왜 자세인가. 릴케는 눈이 없고 입이 없는 토르소의 시선과 말을 읽어냈다.(타인의 관념을 지니는 것) 왜 방향인가. 나를 떠난다는 것은 내 삶으로부터 이탈하는 것 말고 ‘나를 바꾸는 방식’도 있다는 것. 우리는 이렇게 언제 건, 어디에서건 여행할 수 있다.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짓는 글과 달리 영화는 시종 유쾌하고 활달하다. 이번에는 영화를 닮은 유쾌한 글을 적고 싶었지만, 이번에도 나는 실패했다. 아직 나는 나를 여행하지 못하면서도 ‘자신을 여행하는 법’을 쓴 것이다. 무책임하지만 어쩌겠는가. 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닐 테니.  (2021. 7. 7.)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대를 받아 소중한 영화를 관람하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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