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에서 삶의 의미를 생산하는 법에 대하여
영화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
나는 이 삶을 살아갈 이유가 있을까. 불현듯 온 세상이 어두워지고, 시시각각 지나온 내 삶이 눈앞에서 상영된다. ‘빛이 있으라’ 자아라는 기억의 조물주가 명하는 소리에 빛은 암흑에 균열을 내고 기억을 비춘다. 플래시백과 포워드 백이 어지럽게 뒤섞인 기억은 시간적 순서와 무관하게 진행된다. 이건 단 한 사람의 기억이자 그만을 위한 영화다. 기억의 극장에서 상영되는 이 영화를, 그러니까 내 삶을 다 보고 나면, 나는 삶을 살아갈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이 서사의 의미란 이것이라고 당당히 단언할 수 있게 될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내 삶의 제작자이면서 동시에 해석자다. 나는 나아가는 동시에 돌아봐야 한다. 하나도 제대로 하기 버거운 이 과업에 던져진 사람은 바로 누구도 아닌 나다.
이 영화에서 모모코(다나카 유코)가 바로 그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오직 그녀만을 위한 극장에서 모모코는 자기 삶의 의미를 해석해내려 한다. 남편 슈조와 사별하고, 남은 가족인 아들과 딸과 정서적 연대는 몹시 희미한 지금의 내 삶을 앞으로도 살아야 할까, 그녀는 스스로 묻고 또 묻는다. (영화는 이런 질문을 직접적이지 않고 은근한 방식으로 탁월하게 표현한다. 매일 아침 정체모를 요괴는 이불 위에 앉아 그녀를 누르면서 이렇게 속삭인다. ‘일어나지 않아도 돼. 깨지 마. 어차피 오늘은 어제와 다를 것 없어.’ 이 요괴는 다름 아닌 그녀의 생각 중 하나다.) 그러니까 모모코는 끊임없이 자신을 무겁게 짓누르는 생의 허망함을 온몸으로 견디는 중이다.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그 무거움에 질식하거나, 그것을 들어 올리거나. 전자에 해당하는 작가를 나는 알고 있다. 버지니아 울프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같은 사람들. 그들은 자기 삶의 허망함의 무게를 끝내 들어 올리지 않고 질식하는 쪽을 택했다. 이 선택은 매혹적일지 모르겠으나 내게는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보다 나는 후자에 더욱 끌린다. 온몸으로 자기 삶의 무의미를 짊어지면서도, 그것을 결국 들어올리고야마는 사람들. 설령 그 과정이 괴롭고 힘이 부칠지라도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 암흑의 한 복판에서 아주 희미한 빛이라도 찾기 위해 더듬거리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목록이 있다면, 나는 거기에 모모코의 이름을 추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게 모모코의 행동이 더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는 삶에 대한 태도 때문이다. (아마도) 자기 삶에 의미가 충만하다고 생각했을 20대의 모모코(아오이 유우)는 이전에 지나온 자신의 삶을 괄호에 집어넣는다. 거기엔 고향, 사투리, 부모의 강권으로 원치 않던 정략결혼까지. 자신을 이루던 모든 것을 부인하거나 기꺼이 잊고서 모모코는 도쿄로 뛰쳐나왔는데, 70대의 모모코는 과거 자기 삶의 어느 부분을 생략하거나 부인하지 않고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기억해내고서 그것과 차분히 마주한다. 이것은 자기 삶에 정직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책임지겠다는 것이고. 자신이 지금껏 성취했던 것, 가슴 떨리게 기뻐했던 일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후회와 회한으로 얼룩진 일, 수치와 좌절 그 모든 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끌어안겠다는 것이다. 내게 이 얼굴은, 쪼개진 삶의 파편들을 끈기 있게 하나하나 맞춰가면서 어떤 질서와 의미를 생산해내느라 땀이 흥건한 얼굴로 보인다. 이런 얼굴이 아름답다. 그렇게 생산해낸 자기 삶의 의미가 거창하지 않을 지라도, 사소할 지라도 그들은 기꺼울 것이다.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그것도 좋다, 고 할 것이다. (2021. 7. 9.)
이 글은 영화사 진진의 초대를 받아 소중한 영화를 관람하고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