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정식 Sep 25. 2021

나는 잠을 자고 싶은데 너는 춤을 춰야만 하네

영화 <토베 얀손>(자이다 베르그로트, 2021)

‘나는 잠을 자고 싶은데 너는 춤을 춰야만 하네’ 

영화 <토베 얀손>



Ich möchte schlafen, aber du mußt tanzen.

테오도르 슈토름, ‘히아신스’



   영화 <토베 얀손>을 보고서 나는 토마스 만의 소설 '토니오 크뢰거'의 대사 한 구절을 떠올렸다. '나는 잠을 자고 싶은데 너는 춤을 춰야만 하네'. 테오도르 슈토름의 '히아신스'의 시행이기도 한 이 아름다운 구절을 영화 <토베 얀손>에 붙이는 게 가능할지 나는 의문했다. 가능할 것 같았다. 극 중 일곱 번 등장하는 춤추는 토베의 쇼트(그중 한 번은 춤추는 토베 옆에서 잠에 빠진 아토스가 누워있다.) 때문만은 아니다. 토베가 내게 보여주는 자기 삶이 토니오 크뢰거와 닮아보였기 때문이다. 어딘가 초연하면서도 온 힘을 다해 추는 토베를 보면서 나는 잠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잠을 잔 사람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토베와 처음으로 마음을 나눈 아토스(샨티 로니)도, 토베가 진정으로 사랑한다 생각했던 비비카(크리스타 코소넨)도 모두 토베의 열렬한 춤 앞에서 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토베와 다른 만큼 그들도 토베와 다르다. 



영화 <토베 얀손>



   그러니까 토베는 두 가지 삶 중 어느 삶도 선택하지 않은 것이다. 아토스의 삶과 비비카의 삶 중에서. 공평하게 두 삶에 매혹되었고 공평하지 않게 한쪽의 삶을 특별히 사랑했어도 끝내 토베는 두 삶에 자신을 던지지 않았다. 어느 삶에도 속하기를 거부하고, 토베는 자기 삶의 영역을 고요히 그려나갔다. 그것만이 자신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삶이라는 듯이. 토마스 만의 소설에서 토니오 크뢰거는 어릴 때 미소년인 한스를 흠모했다. 모든 면에서 한스는 자신과 반대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토니오에게 없는 것을 한스는 갖고 있었는데, 씩씩함, 사내다움, 영웅, 요약하자면 사람들에게서 받는 사랑이다. 시간이 흘러 토니오가 흠모한 사람이 또 한 명 있었는데, 그녀가 바로 잉에보르크 흘름이다. 굵고 아름답게 땋은 금발, 오똑한 콧날, 푸른 눈. 한스와 잉에, 두 사람 모두 토니오에게 사랑을 건네지 않았으므로 토니오는 사랑을 얻는데 실패했지만, 작품으로 세간의 찬사를 받는 덴 성공했다. 그러나 토니오는 괴로웠다. 자신이 양 극단에서 어느 세계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지금의 여자친구인 리자베타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길 잃은 시민이지요.”


    길 잃은 시민으로서 토니오는 북쪽 지역으로 여행을 한다. 무엇을 찾아야 할지, 아니 찾아야 할 무언가가 과연 있기라도 한 건지, 여행의 목표라고 할만한 것들을 모두 괄호에 집어넣고서 토니오는 부유한다. 토니오가 묵고 있는 호텔에서 무도회가 어느 날 열렸는데, 그의 눈앞에 나타난 사람이 한스와 잉에였다. 그들을 발견하고 토니오가 생각하는 내용이다.


   내 너희들을 잊은 적이 있었던가? 하고 그가 물었다. 아니, 결코 없었다. 너 한스도 잊은 적이 없었고 너 금발의 잉에도 결코 잊은 적이 없어. 정말이지 내가 작품을 써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바로 너희들이었어. 그리고 내가 박수갈채를 받았을 때 난 남몰래 내 주위를 살펴보곤 했지. 너희들이 참석해 있나 하고. 한스네 집 정원 문 앞에서 약속한 대로 너 '돈 카를로스'를 읽었느냐? 읽지 마라! 난 너한테 더 이상 그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외로워서 우는 왕이 너한테 무슨 상관이 있겠니? 넌 우울한 시 나부랭이를 보다가 내 밝은 눈을 흐리게 하거나 어리석은 꿈에 잠기게 해서는 안 된다. 너처럼 되고 싶구나! 다시 한번 시작하여 너처럼 올바르고 즐겁고 순박하게 규칙과 질서에 맞게 신과 세계의 동의를 얻으면서 자라나서 악의 없고 행복한 사람들한테 사랑을 받으면서 잉에보르크 흘름, 너를 아내로 삼고 한스 한젠 너와 같은 아들을 두고 싶구나! 인식해야 하고 창작하는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저주로부터 벗어나 평범한 행복 속에서 살고 사랑하고 찬미하고 싶구나. 다시 한번 시작한다? 그러나 아무 소용없으리라. 다시 이렇게 되고 말 것이리라. 모든 것이 지금까지와 똑같이 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종류의 인간에게는 올바른 길이란 원래부터 존재하지도 않기 때문에 그들이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은 필연이니까 말이다. 

- 토마스 만, '토니오 크뢰거’



영화 <토베 얀손>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 경계에 있는 사람. 가야 할 길을 잃고서 어딘가에서 부유하고 있는 사람. 그러니까 토베 얀손과 토니오 크뢰거 같은 사람. 그런 사람이 ‘어떤 종류의 인간에게는 올바른 길이란 원래부터 존재하지도 않고, 길을 헤매는 것은 필연’이라 하는 독백은 체념인가, 절망인가. 그건 체념도 절망도 아니다, 고 말하는 작품이 ‘토니오 크뢰거’이자 영화 <토베 얀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체념도 절망도 하지 않고서 내가 발 딛고 서있는 이곳이 나의 세계다, 고 말하는 사람들.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기에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사람들(토베 얀손은 삽화가이면서도 소설가이자 순수미술을 하는 화가였다). 어딘가에서 부유하는 것 자체가 어딘가로 향하는 여행이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들. 내가 잠에 빠져있는 동안 어딘가에서 위태롭지만 단단한 춤을 추는 사람들. 그들은 어딘가에서 자신만의 춤을 추면서 하나의 세계를(삶을) 만들어(시작해) 나간다. 그러니 영화 <토베 얀손>의 끝은 이렇게 맺어야 할 것이다. 아토스와 비비카가 아닌 토베와 평생의 반려자가 된 툴리키가 토베에게 이 그림의 이름이 무엇인지 묻는다. 토베는 대답한다. ‘시작하는 사람’. (2021. 9. 24.)






이 글은 시네랩의 초대를 받아 관람한 영화의 리뷰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것도 좋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