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퍼스트 리폼드>, 2017
영화 <퍼스트 리폼드>
눈을 사로잡는 강렬한 이미지들이 영화에 있었지만, 곱씹어 생각할수록 내게 인상적인 것은 톨러 목사(에단 호크)의 사택 내부였다. 그곳엔 생활에 필수적인 것(침대, 테이블, 성경, 토머스 머튼의 책 몇 권)을 제외하고는 어떤 것도 없었다. 없음이 톨러의 방을 가득 채웠는데, 그것이 톨러의 내적인 상태와 같다고 나는 느꼈다. 텅 비어있던. ‘주체의 빈곤’, 또는 ‘의미의 결여’라고 할 만한 것이 톨러의 사택을 경유해 톨러 내부를 겨냥했다. 남편을 심방(상담)해 달라는 아내 메리(아만다 사이프리드)의 요청에 마이클(필립 에팅거)과 마주한 톨러는 대화 내내 하나님을 변호하거나 마이클을 희망의 쪽으로 끌어당겼는데, 그런 그의 모습은 진실한 믿음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 단지 목회자의 기능을 수행한 것에 불과한 건 아닌지, 그러니까 목회자를 가장한 건 아닌지 나는 의혹했다. 영화 내내 알코올에 의존하던 그가 ‘술 드세요?’라는 마이클의 물음에 ‘술은 별 도움이 되지 않아요’라고 답하는 모습에서 이런 의혹은 짙어졌다.
요컨대 톨러는 분열되어 있거나 고장나있다. 자신이 담임목사로 섬기는 퍼스트 리폼드 교회에 대해 ‘기념품샵 같다’며 자조적인 말을 하는 건 본인도 잘 알고 있던 것이다. 교회로서, 목회자로서 기능을 잘 못할 뿐 아니라, 그 일에 의미를 찾지 못한다는 것. 의미가 비어있는 채, 일주일이라는 시간의 관성으로 열리는 예배마다 자신이 해내야 할 일을 한다는 점에서 그는 심적으로 분열되어 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고장났다. 고장난 오르간처럼 그의 몸 속 어딘가가 병들었는데, 이런 맥락에서 톨러와 교회는 서로 닮아있다. 교회가 아프면 톨러도 아프고, 톨러가 분열되어 있는만큼 교회도 존재론적으로 나뉘어져 있다.(제스퍼 목사 조차도 퍼스트 리폼드 교회를 ‘뮤지엄’이라 부른다.) 여기까지만 보면, ‘톨러-교회’라고 할만한 도식이 성립되는데 환경운동가 마이클의 존재가 여기에 또다른 한 층위를 얹는다. 어설픈 도식을 굳이 시도해보자면, ‘톨러-교회-지구’. 이 세가지는 알지 못하는 메커니즘으로 연결되어 영화 안에서 작동한다. 하나의 아픔은 셋 모두의 아픔이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전 마이클이 톨러가 수신인인 유언장에 지금껏 모아온 환경오염 자료를 넣은 것은 상징적이다. 톨러는 마이클의 유산을 받은 셈이다. 퍼스트 리폼드 교회의 담임목사직을 제스퍼 목사가 마련해둔 것처럼 톨러는 이제 새로운 담임목사직을 수행하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을 ‘지구에 대한 목회자’라고 하면 어떨까. 이 소명은 메리와 ‘신비한 마법 여행’을 하면서 다메섹에서 사도 바울에게 임했던 그것처럼 홀연한 계시로 확증된다. 톨러는 그제서야 자신이 해야할 일을 찾은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소명이 꼭 ‘순교’여야 하는가(톨러와 마이클은 타인의 목숨과 자연의 파괴를 동반한 자살폭탄테러를 순교라 여기는 것 같다)에 대해선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의문했는데(환경오염에 반대하면서 ‘순교’로 자신과 타인의 목숨을 훼손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 아닌가?), 톨러와 마이클의 대화를 여러번 보는 중 어렴풋이 이해했다. 절망으로 인한 극단적인 선택과 순교는 다르다는 것. 전자가 의미없음의 상태를 견디지 못한 채 모든 것을 파괴하는 종류의 죽음이라면, 후자는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그것을 자발적인 희생으로 살리려는 종류의 죽음이다. 톨러는 바로 그 일을 하려고 한다.
퍼스트 리폼드 교회 250주년을 기념하여 드리는 재봉헌식 예배에서 톨러는 순교를 감행하려 했지만 메리의 예기치 못한 등장에 시도를 철회한다. (메리는 전에도 차고에서 자살폭탄조끼를 발견해서 마이클의 순교를 막기도 했다.) 톨러는 자신에게 최대한의 고통을 부과하기 위하여 온 몸에 철조망을 두르고 배관세척제를 위스키잔에 담아 마시려 한다. 그런데 이 선택은 마이클의 길을 정확히 따라가는 게 아닌가. 그도 마이클처럼 순교가 막히자 도무지 나아질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자신의 ‘육체-교회-지구’에 절망한 끝에 극단적인 선택을 내리려는게 아닌가. 그러나 마이클의 길과는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저 당혹스러운 엔딩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무엇이 다른가. 기적과 초월이다. 잠겨진 문을 통과하여 사택으로 들어온 메리는 톨러를 응시하는데, 일순간 세상의 조도는 밝아지고 지금껏 불려지지 않았던 그의 이름(first name)이 메리의 입에서 나온다. ‘Ernst’. 그는 죽음을 유예하고 메리와 격정적으로 입을 맞춘다. 암전.
두가지 독법이 있다. 이 장면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누군가를 향한 사랑이 그를 구원할 수도 있다는 독법과 현실이 아니라 죽어가는 그가 본 환상이라는 독법.(영화의 내적맥락을 생각한다면, 이 장면은 확실히 돌출적이다.) 아무래도 나는 후자쪽에 가깝다. 그러나 그것을 결론으로 맺고 싶진 않다. 성급히 절망에 빠지는 것같다. 다른 방법은 없을까. 현실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사랑과 구원이 기적처럼 현실에 임하는 독법을. 어쩌면 폴 슈레이더는 마지막 장면을 통해 리얼리티와 환상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또다른 차원의 지평을 개시해 보인 건 아닐까. 그것은 현실이 아니라서 거짓인가. 그러나 ‘기도하려는 마음 자체가 기도’라는 톨러의 대사처럼 사랑과 기적을, 초월을 현실에 요청하려는 것 자체가 이미 기적이라면. 그것을 시도하려는 것만으로 실재적이며 귀중한 것은 아닌가. 그럼으로써 톨러는 현실의 교회와 세상을 바꾸는 데 실패했지만, <퍼스트 리폼드>의 감독으로서 폴 슈레이더는 기적과 초월을 현실로 가져오는 데 성공한 것은 아닌가.
이 엔딩에서 나는 문득 진은영의 글을 떠올렸는데, 그는 이렇게 적었다.
정체가 모호한 공간, 문학적이라고 한 번도 규정되지 않은 공간에 흘러들어 그곳을 문학적 공간으로 바꿔 버리는 일. 그럼으로써 문학의 공간을 바꾸고 또 문학에 의해 점유된 한 공간의 사회적-감각적 공간성을 또다른 사회적-감각적 삶의 공간성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문학의 아토포스이다. 이렇게 떠도는 공간성, 그리하여 결코 확정할 수 없는 방식으로 순간의 토포스를 생성하고 파괴하며 휘발시키는 일에 예술가들이 매혹될 때 우리는 그들을 공간의 연인이라 부른다. 이 연인-작가들에 의해 작동하는 문학의 아토포스는 우리가 미학의 정치라고 불렀던 것의 또 다른 이름이다. (진은영, 문학의 아토포스, 그린비, 2014, 180쪽)
아토포스는 장소를 의미하는 헬라어 토포스에서 유래한 단어다. 접두사 ‘a’는 부정이나 결여를 뜻하는데, 아토포스는 그러므로 비장소성이라 할 수 있다. 확정된 장소가 아니라 규정할 수 없는 공간, 관념, 가치, 또는 그에 대한 매혹이란 의미도 아토포스에는 있다. 기존 가치들로 점유된 공간에 새로운 사회적-감각적 삶의 공간성을 부여함으로써 그곳을 문학적으로 변화시키려는 것이 진은영의 ‘문학의 아토포스’라는 기획이라 할 만한데, 폴 슈레이더가 창조적으로 개시한 저 지평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아토포스적’ 공간이라 할 수 있지 않은가. 현실을 기적으로 바꿔버리는 일. 결코 확정할 수 없는 창조적인 방식으로 새로운 해석의 공간을 마련하는 일. 그런데 저 일은 영화 감독과 문학 작가들이 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사실 크리스천이 마땅히 세상에서 해야하는 일은 아닌가. 많은 사람들이 별다른 의심없이 따르는 세속적인 가치들을 우리가 가진 진리로 가격하거나 적중하면서, 세속의 완강한 일각을 부수거나 침몰시키는 일. 그럼으로써 현실에 하나님의 나라(토포스)를 더 넓히는 일. 그렇게 현실에 ‘기독교적 아토포스’를 마련하는 일.
이 점에서 나는 ‘기독교적 영화 비평’에 대해 떠올렸는데,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기독교적 영화 비평은 어떠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퍼스트 리폼드>의 엔딩이 우리가 따를만한 좋은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독교적 영화 비평’은 영화 속 어떤 메시지를 기독교적 진리로 일방적으로 환원하는 것도(그것은 그냥 기독교다), 그렇다고 영화를 기독교적 필터를 거치지 않고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아닐 것이다.(그것은 그냥 영화 비평이다) 현실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 기독교적 진리(초월)를 이곳에 끌어당겨야 하는 어려운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 그것이 미학적으로도 아름다우면서도 진리적으로도 옳은, 그러니까 옳고 아름다운 해석을 해야하는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기독교적 영화 비평에 대한 비평이다. 결론이면서 서론이다.
이 글은 '뉴스앤조이'의 기사로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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