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TBC 드라마 <인간실격>
드라마 <인간실격>
묵직하면서도 시급한 질문을 과감하게 관객에게 던진 드라마. 나는 작년 JTBC에서 방영된 <인간실격>을 이 문장으로 말하고 싶다. 내 딴에 어설프게나마 한줄평을 시도한 것은, <인간실격>이라는 드라마가 근래 한국 드라마가 어떤 이유(그것이 상업적인 이유에서건, 또는 작품이 둔중해지는 걸 우려해서 건)로 외면해온 물음을 이 드라마가 직면하면서 그것을 관객에게 되물었기 때문이다. <인간실격>은 무엇을 묻는가. 주연 인물인 부정(전도연)의 대사에서 나는 답을 얻었는데, 부정은 이렇게 묻는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마지막으로 선생님을 만나고 온 그날부터 저는 내내 인간의 자격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가족, 친구, 동료로서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자격. 자기 이름 당당히 걸고, 세상의 룰을 지키며 살아가는 그런 온전한 인간에게만 주어지는, 세상을 판단하고, 비난하고, 분노하고, 절망할 자격. 선생님에게는 있고 제게는 없는 그 자격에 대해서요. 하지만 선생님. 선생님이 말하는 그 세상은 뭐고, 그 인간은 대체 무엇일까요? 그런 게 어딘가에 있기는 있는 걸까요?
‘자기 이름으로 된 책 한 권’을 갖는 게 목표였지만 그것을 이루지 못하고 중견 탤런트 정아란(박지영)의 자서전을 대신 쓰는 대필작가 부정은, 극 중 어떤 이유로 대필작가로서의 삶조차 ‘부정’당한다. 그 과정을 통과하느라 겪었을 통각과 좌절을 갖고 부정은 누구를 향해서도 아닌 질문을 스스로에게 묻는다.(정아란을 향한 독백이지만 대답을 요구한 물음은 아니다) 한 인간으로 여겨질 수 있는 자격은 무엇이고, 그런 게 과연 있기는 한 건지를. 이 질문은 강재(류준열)의 것이기도 한데, 이런 점에서 그의 직업이 ‘역할대행’이라는 건 부정이 처한 상황과 공명한다. 그러므로 이 드라마가 묻는 물음은 존재론적 질문이다. ‘나’라는 인간은 왜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하며, 이 삶을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야 하는지. 이 질문을 외면하면서도 별 어려움 없이 살아가는 어떤 사람들이 있는데, 끝내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이 질문을 끌어안고서 어디로도 나아가지 못한 채 자기 삶을 망설이며 살아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 드라마는 묻는다. ‘당신은 왜 당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부정과 강재는 극 말미에 이르러서 이 물음에 대한 나름의 답을 내린 것처럼 보인다. 그 답에 대해 우리가 탐구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을뿐더러, 우리 몫이 아닐 것이다.(우리는 우리 각자의 질문에 답을 해야 할 것이다.) 그것보다 나는 부정과 강재가 질문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인상 깊었는데, 극 중 내내 나오던 둘의 독백(인간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이기도 한)의 수신인이 ‘아버지’를 향해있다는 점이 내게는 의미심장하다. 둘에게 아버지란 누구며, 어떤 존재였길래. 누군가 아버지에 대해 부정에게 물을 때 그는 이렇게 답한다. 이때 부정의 이름은 부정(父情)으로 읽힌다.
우리 아부지요? 아부지 마음속엔 모든 게 다 있어요. 법도, 철학도, 문학도 다 아부지 마음속에 있어요. 누가 가르쳐준 적도 배운 적도 없는데, 차곡차곡 쌓여있어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시집이에요. 우리 아부지가. 아부지한테는 아부지 마음속에는 말보다 생각이 훨씬 많거든요. 오랫동안 생각한 수많은 생각 중에서 고르고 고른 몇 개만 말이 돼서 나와요.
부정에게 아버지란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시집’이자 언어로 번역된 것보다 말이 되지 못한 생각이 훨씬 더 많은 분인데, 그런 아버지를 통해 부정은 비로소 아주 조금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세상에 태어나 무엇이 되는 것보다 무엇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이것은 극 중 초반에서 물었던,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로의 전환인가. 그렇다. 그렇긴 한데, 이전의 질문을 철회하는 종류의 전환이 아니라 이전의 것을 포함하는 전환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옳은 것 같다. 애초에 인간이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하는 물음과 뗄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니까.
그러므로 <인간실격>은 곡진하게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왜 당신의 삶을 살아야 하며, 이 삶을 살면서 당신은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나는 왜 내 삶을 살아야 하며, 내가 사는 동안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 존재론적 질문이자, 윤리학적 물음이다. 자기 삶에 처해진 사람들 저마다 답을 내려야 하는 무겁고도 시급한 질문. 작은 자들의 목소리는 점점 희박해지고, 그들을 향한 사회의 성원권이 줄어드는 것 같은 사회적 흐름을 우려하면서 나는 다시 이 질문을 시급하면서 무겁게 던져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시간이 지나도 계속 던져야 하리라. (2022. 3.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