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안관을 위한 나라는 없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기본 줄거리는 이러하다. 르웰린 모스(조슈 브롤린)는 사슴 사냥을 나갔다가 마약 카르텔이 잃어버린 이백만 달러를 손에 넣게 된다. 용접공 일로 영위하던 팍팍한 삶을 청산하고 싶은 르웰린은 돈이 든 가방을 들고 도망한다. 돈 가방을 찾는 잔학무도한 살인마 안톤 시거(하비에르 바르뎀)가 그의 뒤를 바짝 쫓는 가운데, 사건 해결을 맡은 보안관 에드 톰 벨(토미 리 존스)까지 그들의 뒤를 추격하기 시작한다.
줄거리에서 미루어 알 수 있듯 영화는 기본적으로 총성이 난무하는 범죄물이자, 쫓고 쫓기는 추격물이며, 그 모든 과정을 조마조마하게 지켜보게 되는 스릴러물이다. '쓸데없이 귀여운' 단발머리를 한 하비에르 바르뎀이 눈도 깜빡하지 않고 사람들을 쏘아 죽이는 반전된 이미지가 유명한 영화기도 하다.
하지만 유명세와는 다르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바르뎀이 연기한 사이코패스 살인마 안톤 시거의 영화도, 약 2시간의 상영 시간 중 1시간 40분가량을 초점화자가 되어 끌고 가던 르웰린 모스의 영화도 아니다.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이자 제목의 '노인'이 의미하는 대상은 바로 보안관 에드. 다시 말해 이 영화는 보안관 에드의 영화이자, 에드로 대변되는 '노인'들에 대한 영화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노인'들의 시대에 바쳐진 영화나 다름없다.
세대는 저물고 시대는 악해졌다.
...라고 적어도 우리의 보안관 에드는 생각한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대를 이어 보안관이 된 그는 왕년 보안관들의 영광스러운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났다. 그는 때때로 궁금해한다. 그들과 나를 견줄 수는 있을까, 그들이라면 이 시대를 어떻게 꾸려갔을까. 에드는 요즘 범죄들은 예전과는 달리 아무런 목적이나 동기 없이 일어난다고 걱정한다. 한때 그는 이런 사건을 담당한 적이 있다.
몇 년 전 한 소년을 사형대로 몰아넣었어. 내가 체포하고 증인을 섰지. 그는 열네 살짜리 소녀를 죽였어. 신문에서는 "격정의 범죄"라고 떠들어댔지만 그 아이는 내게 격정 같은 건 없었다고 말했지. 그저 내내 누군가를 죽일 궁리를 하고 있었다면서. 자신이 출옥하게 된다면 또다시 죽일 것이라고, 자신은 이미 지옥행이란 걸 알고 있다고도 했지. 15분 정도 거기에 있었을까, 도대체 어찌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그렇다고 해서 에드가 보안관으로 일하기를 겁낸다는 것은 아니다. 그는 죽을 각오를 무릅쓴다고 말한 바 있다. 다만 그는 “무모한 객기로 무의미한 범죄에 장단 맞추고 싶지 않을 뿐”이다. 이러한 그를 받아주는 세상이라면, 다시 말해 이러한 그를 필요로 하는 세상이라면 에드는 얼마든지 스스로의 영혼을 위험 속으로 밀어 넣을 의지가 있다.
하지만 시대는 자꾸만 에드를 뱉어낸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던 세상은 진작 사라졌다. 별들이 총총 빛을 내며 길 떠나는 순례자들을 인도해주던 총체성의 시대 역시 끝이 났다. 아닌 게 아니라 세상은 이제 더 이상 마약이나 돈만 해결한다고 나아지는 곳이 아니다. 상관관계도 이유도 없는 범죄가 넘쳐나고 논리와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세상 한복판에서, 에드는 그러한 세상의 문법을 그대로 흡수한 듯한 안톤의 뒤를 쫓아야 한다.
안톤에게는 세상의 법칙이 통하지 않는다. 그를 잘 아는 킬러 칼슨 웰스는 안톤을 협상 불가능한 자, 그 누구도 감당 불가능한 자라 평하며 안톤은 돈이나 마약 따위를 뛰어넘는 스스로만의 원칙이 있노라 말한다. 문제는 그의 원칙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는 점이다. 안톤의 원칙이란, 확고한 신념이나 비뚤어진 정념 같은 것이 아닌 동전의 앞뒷면이 가진 50:50의 확률일 뿐이다.
안톤은 자신과 맞닥뜨린 자들을 동전 던지기 게임에 참여시킨다. 한 면은 죽음, 한 면은 삶이다. 앞이 나오면 그는 살고, 뒤가 나오면 그는 죽는다. 갑작스레 게임에 참여하게 된 이들은 영문도 모르는 채 자신의 생사를 가르는 앞뒷면을 선택해야 한다. 돈 가방을 쫓아가던 중 들린 철물점에서 주인은 안톤에게 "오는 길에 비가 좀 왔소?" 하는 가벼운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에 심기가 불편해진 안톤은 그 대가로 그를 영화 속 첫 번째 동전 던지기 게임으로 인도한다.
-동전 던지기로 가장 크게 잃어본 건? / -네?
-동전 던지기로 가장 크게 잃어본 게 뭐요? / -글쎄요, 별로...
-(동전 하나를 가판대 위에 올려놓으며) 정하시오. / -정해요?
-왜요? / -그냥 정해.
-뭘 걸고 하는진 알아야죠. / -어서 정하시오. 내가 정해주는 건 불공평하니까.
-내기 건 게 없는데.
-아니, 걸었소. 댁 목숨을 걸었지. 모르고 있을 뿐. (중략) 앞 아니면 뒤잖소. 어서 정하시오.
사느냐 죽느냐. 햄릿에게 앞선 문장이 한 국가의 왕자로서의 책무와 한 아비의 아들로서의 복수 사이에서 어떠한 길을 택해야 할지를 고찰하는 의미심장한 문장이었다면, 안톤에게는 다르다. 안톤에게 사느냐 죽느냐 하는 질문 자체는 무의미하다. 이 문장은 그저 동전의 앞뒷면, 50:50 확률로만 기능할 뿐이다.
생사를 가르는 동전 던지기 앞에서 안톤에게 사정을 이야기하며 "돈을 갖다 줄게"라든가 "난 여기서 빠지면 그만이야"라며 목숨을 구걸하는 건 굉장히 무의미하다. 그는 필요와 규칙에 따라 움직이지 않으니까. 돈이나 마약 따위로 그의 시선을 돌릴 수는 없다는 소리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안톤에게 “이럴 필요 없잖아요(You don’t have to do this)”라며 절규한다. 그러나 문장을 뒤집어 질문해 본다면 안톤이 보는 건 오히려 이런 의문에 가깝다. “Why don’t I have to do this?” 그의 의지, 그의 생각, 그의 결정 같은 건 있을 필요도 없다. 모든 건 그냥 우연이 지배하는 확률 게임에 불과하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카오스 같은 안톤에게도 나름대로 변명거리가 있다. 그의 앞에서 죽음을 목도한 많은 사람들은 대다수가 규칙을 지키며 살아오던 이들이었다. 법을 어겨 도망하던 르웰린이나 킬러 칼슨조차도 나름의 규칙과 상식은 가지고 있다. 온전하게 우연과 확률의 세계에 몸을 던진 사람은 결국 아무도 없으니, 안톤의 시선에서는 모두가 규칙을 믿으며 살아왔다고도 할 수 있다. 안톤의 변명은 이곳에서 출발한다. 규칙을 지켜 살아오던 당신들 앞에 끝내 떨어진 것이 바로 나라면, 다시 말해 나라는 존재를 만나 죽음을 맞게 된 것이라면, 그렇다면 그 규칙의 쓸모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와 같은 안톤의 모습이 새로이 도래한 시대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을까. 이성과 논리만으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상하의 구분이 무의미해져서 가장 귀중한 것(목숨)이 가장 하찮게 치부될 수도 있는, 거대한 법이나 질서 따위는 애초부터 없는, 다층적이고 다변적인. 말하자면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 안톤은 이러한 시대 자체의 표상이다.
그에 반해 에드는 어떠한가. 과거의 영웅들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있으며, 이해 가능한 범죄만을 다루고, 상식과 논리로 세상을 이해하려던 에드. 지난 시대의 법도 규칙도 없는 이곳에서 여전히 상징 질서에 묶여 있는 에드의 얼굴은 이미 저물어버린 시대의 군상에 지나지 않는다. 시대와 함께 늙어버린 자, 그렇게 노인이 되어버린 자, 보안관 에드.
영화의 말미에서 에드는 안톤의 손에 끝내 죽임을 당한 르웰린의 사체를 발견한다. 경찰이든 마약 감시반이든 그 누구와도 협업하고 싶지 않아 하던 에드는 그 절체절명의 순간 돌연 주위 사람들에게 경찰을 불러달라고 부탁한다. "여기는 내 무전기가 안 되니까..." 중얼거리며 스스로를 위로하지만 사실은 그도 알고 있다. 이건 단순히 관할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변화한 세상 앞에 에드의 은퇴 선언은 그리하여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오늘날의 무법은 더 이상 '황야의 무법자(outlaw)'들의 것이 아니게 되었지 않나. 법(law)의 바깥(out)에 있던 것을 다시 법의 테두리 안으로 끄집어 오기만 하면 되던 시대는 끝났다. 통제 가능한 법과 질서는 영영 사라진 진정한 무(無)-법(法)의 시대. 지금의 무법은 어찌 보면 우주적 질서인 태곳적 혼돈(chaos)에 가깝다. 위풍당당 말을 타고 달리던 위대한 보안관 아버지(father)는 이제 꿈속에서만 볼 수 있는 위인이 되었다. 세상을 빚고 질서를 만들던 아버지(Father)의 말은 죽었다. 그 어떠한 말[馬]과 말[言]도 카오스에 질서를 부여할 수 없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기에 에드는 사라져야 한다. 에드는 은퇴를 결심한 후 선배 보안관 엘리스를 찾아간다. 엘리스의 눈에 에드는 영 지쳐 보인다. 그는 너무 늙어 버렸다.
-자네, 늙수그레해졌구만. (I gotta say you are looking older.)
-늙었으니까요. (I am older.)
늙어 노인이 되면 신이 자신을 돌봐줄 거라고 생각했지만 신은 그러지 않았노라, 무겁게 털어놓는 에드에게 엘리스는 말한다.
자네가 겪는 일은 전혀 새로운 게 아냐. 가혹한 세상이지 않나.
오는 변화를 막을 순 없어. 자네를 위해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그건 헛된 거지.
(What you got ain’t nothing new. This country is hard on people. You can’t stop what’s coming. It ain't all wating for you. That’s vanity.)
영화 전체를 집약한다고 할 수 있는 엘리스의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이렇다. 네게 닥친 일은 새로운 것도 아니고, 새로울 것도 아냐. 쉽지 않은 세상이니까. 변화하는 건 막을 수 없고, 또 그 변화한 것이 다시 흘러가는 것 역시도 막을 수 없지. 오늘의 것들은 또 금세 낡아 노인이 될 것이고, 그들은 또다시 사라질 것이고, 지나간 것은 붙잡을 수 없으며, 기다려주길 바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게 사라지고... (말줄임표는 도돌이표가 되어 영원히 그치지 않는 문장을 이룰 것이며...)
세상은 그런 의미에서 모두에게 공평하다. 끊임없이 변화하며 오늘의 것들을 어제의 것들로 밀어내고, 오늘의 아이를 늙수그레한 노인으로 바꾸어 둔다. 한 가지 더. 세상이 카오스라면, 그 혼돈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잔인하기도 하다. 모든 일을 다 처리한 뒤 유일한 승자가 된 듯 보이는 안톤마저도 전혀 뜻하지 않게, 덧없고 의미 없게 세상에서 밀려날 수도 있다. 50:50, 살거나 죽거나.
다만 지금 당장은 노인의, 에드의 차례일 뿐이다. 슬퍼할 것도, 기릴 것도 없다.
보안관을 위한 나라는 더 이상 없다.
덧.
50:50의 확률이라고만 해두면 오히려 단순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까 하여 덧대는 말. 사실 50:50이라는 확률도 수없이 많은 가짓수로 분화할 수 있다. 에드가 엘리스를 만나러 갔을 때, 온 집 안을 돌아다니는 고양이 떼를 보며 에드가 묻는다.
"지금 몇 마리나 있나요? (How many of them things you got now?)"
있거나 없거나, 50:50의 답변이려나 싶지만 전혀. 엘리스의 우문현답.
"글쎄, ‘있다’의 의미를 어떻게 두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반쯤 길들여진 고양이도 있고, 아예 길들여지지 않은 길고양이도 있고. (Well, it depends on what you mean by *got*. Some of them are half wild, some of them are just outlaws.)"
다시 말해, 여기서 중요한 건 50:50이라는 숫자라기보다는 계산할 수 없는 우연성 그 자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