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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월 Dec 28. 2020

<레베카>(2020)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맨덜리

벤 휘틀리의 <레베카>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알프레드 히치콕의 동명의 영화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대프니 듀 모리에의 소설 『레베카』가 가장 첫머리에 있는 원작이긴 하지만 히치콕 영화의 명성과 아우라가 워낙에 대단하지 않은가. 그 어마어마한 무게를 떨치고 영화 리메이크 방향을 잡기 쉽지 않았겠지만 휘틀리는 이 문제를 영리하게 피해 간다. 다시 말해 그의 영화는 취사선택이 확실한 작품이다. 그는 처음부터 히치콕의 서스펜스를 뛰어넘으려는 마음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항불가의 영역을 애초에 넘보지 않은 느낌이랄까. 대신 휘틀리는 보다 뚜렷한 메시지와 명료한 인물로 주제 의식을 강화하는 것에 구별점을 둔다. 고전을 각색하는 데에 따르는 위험을 줄일 수 있는 현명한 방법이자, 또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이 제 나름의 매력이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기대만큼의 심리적 압박감이 부재하여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80년의 간격을 둔 히치콕의 <레베카>(1940)와 휘틀리의 <레베카>(2020) (출처: 네이버 영화)


그렇다면 휘틀리가 방점을 둔 이야기는 무엇인가. 그의 <레베카>는 말하자면 무엇보다도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레베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소설 『레베카』 및 기존 각색품인 히치콕의 영화나 뮤지컬 <레베카>가 미묘한 어긋남이 중첩되는 여성 관계를 특징으로 한다면, 휘틀리의 맨덜리에서는 연대와 믿음으로 이어진 충성스러운 여성들의 계보가 새로이 펼쳐진다.




이미 죽고 없지만 그 누구보다 강력하게 존재하는 레베카. 레베카는 그를 아는 대다수의 이들에게 사랑스러운 여인이자 묘한 마력을 가진 여인으로 기억된다.

“그렇게 아름다운 여인은 본 적이 없었지.”
“왜, 그런 여자 있잖아. 남자든 여자든 다 홀려 버리는, 우리 같은 인간이랑은 부류가 다른 사람."

그 무수한 말들은 모두 표표 떠돌기만 한다. 레베카의 실상을 안다고 생각하던 맥심에게조차 마찬가지다. 그는 아무도 레베카의 잔인함을 몰랐을 것이라며 치를 떨지만, 그 역시도 전 아내에게서 한쪽 얼굴만을 읽어낼 뿐이다. 레베카는 그렇게 성녀 혹은 마녀로 치부되어 기이한 공기처럼 세상을 떠돌아 다닌다.

Everybody's talking about Rebecca (출처: IMDB)


그런 레베카의 다양한 모습을 제대로 보고 기억하고 또 불러주는 건 어릴 적부터 그를 돌보아 준 댄버스밖에 없다. 애초 레베카의 혼이 맨덜리 저택을 가득 메우게 된 것도 그를 끊임없이 생의 공간에 붙잡아 두려던 댄버스의 집착 어린 분투였지 않나. 댄버스를 통해서 이전에 모르던 레베카의 새로운 모습들이 되살아난다. 그는 그저 착하고 순종적인 양처()도, 잔인함과 저속함으로 남성들을 끌어들이던 타락한 악녀도 아니다. 

"그분은 너희 모두를 경멸했어. 런던 남자들과 맨덜리 파티에 놀러 온 남자들, 전부 그분에겐 놀잇감에 불과했지. 여자는 즐기면서 살면 안 되는 거야? 나의 레베카는 마음껏 즐기는 삶을 살았어. 그러니 남자가 죽이려 들었지!"

레베카는 허울뿐인 것에 집착하는 남편을 비웃고, 자신의 비위를 맞추며 꼬리를 살랑거리던 주위 남성들을 조롱하는 방식으로 가부장 질서를 내파(內-破)하며 유희한다. 주변 사람들이 기억하는 사랑의 마녀, 맥심이 기억하는 광기의 마녀라는 명칭만으로는 그를 붙잡아 두기엔 부족하다.


그러나 그런 댄버스조차 레베카를 전부 포착하는 데에는 실패한다. 댄버스가 자부한 것처럼 레베카가 모든 일을 비밀 하나 없이 댄버스에게 말했느냐 하면 꼭 그렇지도 않았으니까. 단, 휘틀리의 영화에서 댄버스는 다른 각색작에 비해서는 레베카로부터 크게 튕겨져 나오지 않는다. 


예컨대 앞선 작품들의 경우, 댄버스가 집에 불을 지르는 행위는 그가 내내 집착해 온 ‘나만의 레베카’조차도 실은 부재했다는 것을 자각함으로써 비롯된다. 반면 이번 영화에서 댄버스는 레베카와 자신만의 장소였던 맨덜리를 다른 이에게 넘길 수 없기에 저택을 태우기로 결심하지 않나. 레베카와 댄버스 둘 사이의 공고한 연대가 두드러지는 대목이다. 나만의 레베카와의 추억이 ‘가득한 줄만’ 알았던 집을 태우는 것과, 나만의 레베카와 추억이 ‘가득한’ 집을 태우는 건 다르니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댄버스에겐 조금 잔인한 결말일지 몰라도 레베카가 그의 손에서까지 또 한번 미끄러지길 바랐다. 댄버스가 느낀 배신감과 상실감만큼이나 레베카는 누구도 쉬이 포착할 수 없는 살아있는 이름이 되는 것이니. 하지만 이러한 레베카와 댄버스의 관계가 감독이 추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부합하는 각색이었음은 분명하다.


휘틀리의 맨덜리로 다시 발걸음 하여 댄버스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 보도록 하자. 레베카를 향한 댄버스의 태도를 사랑이 아니라 할 수 있을까. 다소 뒤틀리고 기이하긴 해도 죽은 이를 놓지 못해 끝내 그곳을 ‘레베카의 집’으로 만들어 버린 그 마음은 사랑이 아닐 수 없다. 맨덜리 하우스를 완벽하게 통제하는 엄격한 집사, ‘나’를 옭죄어 오는 잔인한 댄버스의 모습은 레베카 앞에서만큼은 사라진다.

맨덜리의 차가운 집사, 댄버스 (출처: IMDB)


레베카가 상징 질서를 조롱하며 그 너머의 영역에서 유희했듯, 댄버스 역시 그 질서의 틈바구니에서 허락되지 않은 사랑을 한다. 평생을 나만의 레베카를 위해 살아온 댄버스는 끝까지 그를 위해 맨덜리 저택을 태우고 죽음으로 생을 마무리한다.


아버지의 성(姓)을 따라 내려오던 성(城) 맨덜리 저택의 붕괴는 곧 공고한 가부장제의 붕괴와 같다. 맥심은 생전 레베카의 실체를 알면서도 가문의 명예를 위해 아무런 조치를 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가 일생을 걸고 지켜오던 ‘드 윈터’라는 이름은 결국 불타 없어지고마는 건물에 불과하다. 그 허상을 무너뜨리고 붕괴시킨 건 어떤 의미로든 여성-연대 내지는 여성-로맨스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남은 여인인 ‘나’는 어떠한가. 이 영화에서 동류로 묶일 수 있는 레베카와 댄버스와는 다르게 ‘나’는 이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인다. ‘나’는 댄버스의 가스라이팅에 마구 휘둘리는 피해자이기도 하고, 레베카/댄버스에게 대항하여 맥심의 편에 서서 사건을 은폐하는 듯 보이기도 하니까.

댄버스와 '나' (출처: 네이버 영화)


그러나 ‘나’ 역시도 주목해야 하는 또 다른 여인의 초상임엔 틀림없다. 맥심은 영화 말미에서, 레베카가 자신이 사랑했던 해맑고 서툴던 어린 당신의 모습을 앗아갔다며 슬퍼한다. 

“You are not that person anymore.” 

소녀같이 천진무구하고 성녀같이 맑은 아내를 원하는 맥심의 마음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대사다. 그러나 ‘나’는 맥심에게 이렇게 답한다. “Don’t hate her for that.” 한국어 번역이 꽤 마음에 들었다. “꼭 나쁜 것만은 아니야.”


댄버스의 손아귀에서 마냥 당하기만 하던 미숙하고 나약한 ‘나’는 더 이상 없다. 내게 소중한 사랑을 쟁취하고야 마는 강인한 여성, 불타버린 가부장의 집을 뒤로 하고 나와 우리 모두를 환영하는 집을 찾아 방방곡곡을 여행하는 여성, 잃은 것에 슬퍼하지 않고 지켜낸 것에 기쁨을 느끼는 여성의 얼굴이 여기 있다. 레베카와 댄버스가 떠난 생 위에서 삶을 이어가야 하는 새로운 여성의 얼굴이.


그리하여 첨부하는 '나'의 얼굴 (출처: 네이버 영화)




레베카(Rebecca) | 벤 휘틀리(Ben Wheatley) |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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