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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월 Dec 28. 2020

<모리스>

사랑해, 온 마음과 온몸 다해

파도도 지우지 못하는 흔적들이 있다. 어쩌면 영원히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흔적들이. 


20세기 초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공부하는 모리스는 새로운 세상을 만난다. 거침없이 서로의 의견을 피력하는 치열한 식사 시간과, 권위자인 교수의 해석에 야유를 퍼붓는 학우들은 모리스도 모르는 새 그의 세계에 조금씩 균열을 만든다. 그 모든 것 중 모리스의 세계를 통째로 뒤흔드는 건 단연 클라이브의 존재다.


같은 성별 간의 사랑이 죄악으로 간주되던 시대였지만 모리스와 클라이브는 서로를 알아보고 속절없이 사랑에 빠진다. 그들에게 허락된 세상의 사랑은 대학 강의 시간 플라톤의 『향연』속 사랑의 언어를 더듬더듬 읽어가며 해석하는 정도의 사랑이다. 하지만 모리스에게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그의 사랑은 무엇보다 온몸으로 부딪히는 마음이다. 


모리스의 사랑은 문자로 박제된 쪽이라기보단, 말할 수 없는 진심을 고백하고 늦은 밤 사랑하는 이를 찾아가 와락 끌어안는 쪽에 가깝다. 학감과의 식사 시간에 모리스는 말(words)보다 행동(deeds)이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이후 말과 행동을 둘러싼 작은 논쟁이 펼쳐지지만 그는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는다.


온몸으로 부딪히는 온 마음 (출처: 네이버 영화)


모리스는 클라이브를 만지고 그에게 입맞추고 싶어 한다. 사랑하니까. 하지만 모리스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 준 클라이브는 그가 세상 밖으로 나오자 오히려 선을 긋는다. 클라이브는 플라토닉한 사랑만이 남성들 간의 사랑에서 가능하며, 또 가능해야만 한다고 믿는다. 그를 만지고 그와 입맞추고 싶은 모리스의 마음은 그러면 너무 저속해지는 것 같다는 클라이브의 말 앞에서 무너진다. 


그렇기에 그들의 사랑은 좌절될 수밖에 없다. 자신의 무릎에 기댄 연인의 머리를 조심스레 쓸어내리던 모리스에게, 다투던 중에도 거칠게 입 맞추어 입술을 물어뜯는 모리스에게, 정신을 잃고 쓰러진 클라이브가 깨어나자 주위는 신경 쓰지도 않고 그에게 키스를 퍼붓는 모리스에게, 행동 없는 사랑은 완전하지 않다.


-Can't you kiss me?   -I think... I think it would bring us down.(출처: 네이버 영화)


그들이 학교에서 함께 읽던 책, 『향연』. 클라이브가 그리스로 훌쩍 여행을 떠난 이유는 사랑의 기원을 이야기하던 책의 언어를 붙잡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삶으로 되살려내지 못한 사랑의 말은 그저 글자에 불과하다. 박제된 글에 기대어 답을 갈구하던 그의 발길이 닫는 곳은 이미 폐허가 된 유적지뿐이다. 그러니 그 여행에서 클라이브가 아무것도 찾지 못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여정을 끝마치고 돌아온 영국에서 여행이 어땠냐 묻는 사람들의 말에는 실망스러웠다고 답할 수밖에 없다.


끝내 말을 뛰어넘을 무엇도 찾지 못한 클라이브는 법전 속 말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모리스에게 이별을 고한다. 모든 것을 덮고 사회의 궤도 속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세상을 알아 버린 모리스는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오히려 한 발 더 나아간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의 말과 행동 전부로, 온 마음과 온몸으로 할 수 있는 사랑을 만난다.


한밤중 그를 찾아온 클라이브 집의 사냥터 지킴이 알렉 스커더와 관계를 맺은 모리스는 환희에 찬 사랑을 시작한다. 덜컥 두려움을 느껴 도망치려는 모리스에게 알렉은 끊임없이 자신의 사랑을 내보인다. 그의 눈앞에 나타나고, 자신을 영원히 잊지 말라며 온몸으로 그를 끌어안는다. 사랑의 행동으로 가득한 알렉을 모리스가 거부할 방법은 없다.


"Sleep the night with me." (출처: IMDB)


모리스는 먼 나라로 떠날 예정이던 알렉이 자신을 위해 미래를 포기한 채 영국에 남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기쁨에 젖어 알렉이 있을 클라이브의 저택으로 향한다. 알렉을 만나기 전, 모리스는 식사 도중 잠시 집 밖으로 나온 클라이브를 붙잡고 자신이 알렉과 사랑에 빠졌노라 고백한다. 자신과 모리스의 사랑을 그저 어린 날의 불장난으로 덮어두고 싶은 클라이브는 모리스의 희열이 불편하다. 그런 그에게 모리스가 말한다. 

“저속해 보일지 몰라도 나는 피와 살이 있는 인간이네. 난 그것을 알렉과 나눴어.” 

모리스는 클라이브에게 단어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모든 이야기를 했노라 덧붙인 뒤 알렉을 찾아 떠나간다. 모리스는 그렇게 말과 행동이 함께 하는 사랑으로 완전해진다.


자신의 사랑을 제대로 표현할 수조차 없어 스스로를 ‘오스카 와일드처럼 말할 수 없는 부류’라고 설명하던 모리스는 행동뿐 아니라 말까지 살려내며 사랑을 완성한다. 반면 먼저 사랑을 고백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클라이브는 스스로에게서 사랑의 행동뿐 아니라 말까지 앗아간다. 그가 사랑했던 모리스에게 그 어떤 것도 언급하지 말자고 상처 주며, 잊고 싶은 과거를 들추는 집사에게는 이 집에서 일하고 싶거든 다시는 그걸 입 밖에 내지 말라고 협박하며.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모리스가 사랑을 향해 떠난 뒤 쓸쓸한 눈으로 창밖을 내다보는 클라이브의 시선이다. 그의 눈에 보이는 건 가장 아름답던 시절의 사랑, 케임브리지에서 해맑게 손 흔들며 인사하는 모리스의 모습이다. 사랑의 말이 살아있던 그때, 어쩌면 사랑의 행동도 가능했던 그때.


어쩌면 사랑의 행동이 가능했던 (출처: <모리스> 스크린샷)




모리스(Maurice) | 제임스 아이보리(James Ivory) |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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