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사랑빛은 인디고(indigo)
<무드 인디고>의 엔딩 크레딧 노래는 Loane의 <Mais, Aime La>. 번역하자면 '하지만, 그녀를 사랑해 줘'라는 뜻이다. 이 노래의 가사만큼이나 이 영화를 잘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가사를 몇 줄 빌려 적어보는 <무드 인디고>의 환상과 현실, 그리고 낭만과 사랑.
1.
인생도 사랑도 변하는 것 좋았다 나빴다
경쾌한 재즈 선율과 활기 넘치는 타자 소리로 영화가 시작된다. 거대한 홀을 꽉 채운 사람들이 열심히 타이핑하고 있는 것은 주인공 콜랭의 삶. 마치 콜랭의 서사를 만드는 곳으로 보이는 공간에서 그에게 부여된 첫 문장은 바로 “콜랭은 목욕을 마쳤다.” 그때부터 공드리 특유의 마법이 펼쳐진다. 강처럼 깊은 욕조 속에서 콜랭은 헤엄치고, 천장에서 떨어지는 보랏빛 물을 받아 화분 속 식물은 단숨에 꽃을 피워낸다. 창을 통해 콜랭의 집에 쏟아지는 햇살은 현악기의 현이 되어 멋진 음악을 선사한다. 부엌에선 모니터 속 셰프와 소통하며 요리를 하고, 그렇게 완성된 음식에는 짤랑거리는 오색 비즈들이 박혀 있다. 콜랭의 삶은 환상 그 자체다. 뮤지컬 <랭보>의 대사 한 줄을 들고 오자면, 그의 삶은 그야말로 “모든 사람들이 가슴을 열고 온갖 술이 흐르는 축제”인 셈.
낭만 가득한 그는 칵테일 한 잔을 마실 때도 그냥 마시지 않는다. 친구 시크를 초대하여 자신이 발명한 칵테일 피아노를 선보이는 콜랭. 음 하나하나마다 알코올이나 향료가 나오고, 마이너 코드는 그리움의 맛, 메이저는 낙천적인 맛을 만들어낸다. 곡을 연주할 때 애드리브를 몇 개 넣으면 맛이 달라지는 낭만적인 한 잔 술. 삶의 모양이 그러하기에 콜랭은 너무도 쉽게 “나도 사랑에 빠질래” 하고 외칠 수 있다. 그의 서사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콜랭은 일 안 해도 먹고 살 걱정 없을 만큼 충분한 재산이 있다.”
하지만 귀여운 다짐대로 클로에와 사랑에 빠져 결혼한 콜랭 앞에는 생각지도 못한 삶이 펼쳐진다. 클로에의 폐 속에 수련(睡蓮)이 자라는 희귀한 병에 걸리며 둘의 삶은 나날이 힘들어진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콜랭은 이제 나가서 일을 해야만 한다. 사랑이 어려워지는 순간은 물리적으로 구현된다. 햇살과 색깔 가득했던 그의 삶은 차차 빛과 색을 잃는다. 집은 점점 좁아지며 입구는 점점 작아지고 천장은 점점 낮아진다. 그의 삶의 공간은 폐허처럼 변해 간다.
2.
그녀를 사랑해 줘 가까이서 지켜 줘
그녀를 사랑해 줘 네 품속에 꽉 안아 줘
변해가는 삶 속에서도 클로에를 향한 콜랭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그녀를 향한 콜랭의 사랑이 충실했다 말할 수 있는 까닭은 아마 그가 스스로를 깨부수면서까지 클로에를 향한 마음을 지켰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은 자기동일성의 파괴라고들 하지 않나. 그 첨예한 사랑은 그들이 듣던 노래를 통해 단적으로 드러난다.
콜랭과 클로에의 첫 데이트 날, 구름 캡슐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을 때 그곳에서 Etienne Charry의 노래 <The Rest Of My Life>가 흘러나온다.
I will always love you. There will never be another you.
Love is here forever, for the rest of my life.
(나는 영원히 당신을 사랑할 거예요. 오로지 당신밖에 없어요. 내 사랑은 영원할 거예요, 삶이 끝날 때까지.)
콜랭은 버튼을 쾅쾅 눌러 노래를 꺼버린다. 이 노래에 안 좋은 추억이 있냐는 클로에의 질문에 그는 “나는 팝송을 싫어해요, <클로에>라는 노래만 빼고요”라고 답한다. 팝송을 싫어하는 콜랭이 듀크 앨링턴의 <클로에>만을 예외로 두는 이유는 둘이 처음 만났을 때 그 노래에 맞추어 휘적휘적 비글무아 춤을 췄던 기억 때문일 테다. 오로지 사랑만을 예외를 두는 콜랭을 보며 클로에는 그를 위해 헌정곡을 만들어 나지막이 불러준다. 노래의 가사는 온통 사랑하는 이의 이름. “콜랭, 콜랭, 콜랭……”
결혼식 후, 신혼여행 길 차 안에서 또 한 번 <The Rest Of My Life>가 흘러나온다. 콜랭은 또다시 음악을 끄려 하지만, 온통 회색인 신혼여행 길 풍경을 무지갯빛으로 만들어 주는 달콤한 '무지개 옵션'에 노래까지 포함되어 있어 그것만을 따로 끌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사랑은 그런 것일 테다. 마음에 드는 것만을 골라서 선택할 수 없다. 척박한 잿빛 도시에서 무지개를 보고 싶다면 기껍지 않더라도 노래도 함께 들어야 한다. 나중이 되면 콜랭은 그 노래에 맞추어 신나게 뛰어다니기까지 한다. 클로에가 음악을 듣고 싶어 하자 후다닥 침대에서 내려가 LP판을 틀고, <The Rest Of My Life>를 들으며 그녀가 신나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흘러나오는 노래는 그들의 네모난 방을 둥글게 바꾼다. 콜랭의 사랑은 그의 취향을, 마음을, 공간을 바꾼다. 그는 그 자체를 변화시키는 사랑을 한다.
3.
사랑은 블랙이든 블루든 정해져 있지가 않아
<무드 인디고>의 캐치프레이즈는 “당신의 사랑은 어떤 색인가요.” 그에 부응하듯 영화 메인 포스터도 형형색색 붉은 빛으로 가득하다. 흔히들 사랑의 색깔은 더없이 화려하고 더없이 뜨거운 색이라 믿으니까. 그렇다면 갈수록 색깔을 잃는 <무드 인디고> 속에서 사랑도 어쩔 수 없이 사그라지는 것일까.
사랑은 무너진 폐허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보게 한다. 신혼여행을 가던 길에 콜랭은 햇빛이 나온 줄 알고 차 안에 켜두었던 무지개 옵션을 끄려 한다. 클로에는 “아직 햇빛이 나지 않았어”라며 다급하게 외쳐보지만 그는 이미 옵션을 꺼버린 상태. 눈을 감은 채로 콜랭은 바깥 풍경을 자신이 맞혀보겠노라 말한다.
곧게 뻗은 길에 멋진 풍광이 펼쳐져 있고, 양쪽으론 빼곡히 늘어선 가로수들. 푸르른 풀밭에 소들이 누워 풀을 뜯고, 벌레 먹은 문에 꽃 만발한 울타리, 사과가 열린 사과나무, 낙엽더미, 여기저기 눈이 쌓여 있고 분위기 전환을 위해 야자나무까지. 미모사와 쭉쭉 뻗은 소나무들……
클로에는 회색뿐인 주변 풍경과는 전혀 딴판의 이야기를 하는 콜랭이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 얼굴에 한껏 미소를 띤 채 콜랭의 눈을 손으로 가려준다. 콜랭은 따라 웃으며 클로에의 손을 눈에서 치운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둘은 이렇게 외친다. “그리고, 찬란한 햇빛!”
햇빛이 없다고 누가 그러던가. 당신의 눈에 이렇게 햇빛이 찬란한데. <Mais, Aime La>의 가사에서 사랑은 블루든 블랙이든 정해져 있지 않다고 한다. 콜랭의 사랑이 우울해보여도(blue), 그의 삶이 그저 깜깜해보여도(black) 그에게는 여전히 사랑이 있다. 그렇다면 그는 그 블루와 블랙을 넘어 또 다른 색을 보았지 않았을까. 예컨대, 파랑색과 검정색을 섞은 인디고 색깔을 봤을지도.
4.
사랑이 온 것만으로 행운이라고 생각해
“사랑이 온 것만으로도 행운이라고 생각해”라는 이번 가사는 다음의 두 문장 뒤에 이어지는 가사다.
사랑은 변덕도 심하고 너무나 어려워 / 스쳐 지나가고 깨지고 사랑은 너무나 약해
사랑은 블랙이든 블루든 정해져 있지가 않아 /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하지
쉬이 변해 버리는 사랑인데, 그 무엇 하나 정해져 있지 않은 불안한 사랑인데, 노래는 그런 사랑이 온 것만으로도 행운이라 생각하라고 한다. 참으로 지독한 사랑 예찬이 아닐 수 없다.
콜랭은 클로에의 병이 갈수록 악화되자 직접 삶의 타자기를 잡기로 결심힌다. 영화 오프닝에서 봤던 거대한 홀 속 사람들 틈바구니로 들어가 절박하게 문장을 두드린다. 이곳의 타자기는 컨베이어 벨트 같은 책상 위에 놓여 있어 일정 시간이 지나면 그것에서 손을 떼어 옆 사람에게 타자기를 넘겨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차례가 지나도 콜랭은 타자기에서 손을 뗄 수 없다. 그가 쓰는 글 내용은 이렇다.
클로에의 병세는 점점 호전되었다.
결국 모두가 미소를 되찾은 걸로 보였다.
웃음이 참 예뻤던 콜랭이 꿈꾸는 자신의 미래는 이와 같다. 볼 수 없는 미래를 꿈꾸는 콜랭과, 병상에 누워 있는 클로에가 교차해서 나오며 노래가 하나 흘러나온다. “뼈가 다 으스러져도 다시 걷기를 배울 거예요. 다시 춤을 배울 거예요. 이제 곧 봄이 올 거예요. 4월의 봄비 후엔 5월의 꽃이 피고. 곧 써머타임이 시작되겠죠.”
우리의 삶이 예측불가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Mais, Aime La>의 가사처럼 “좋았다 나빴다” “변하는 것”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 삶의 서사를 만드는 이들이 타자기에 잠깐 손을 댔다가 이내 곧 그 손을 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수많은 사람들의 랜덤한 아이디어로 만들어지는 것이 곧 우리의 삶인 셈이다. 콜랭처럼 직접 끈덕지게 타자기를 잡고 원하는 방향으로 글을 쓰면 좋겠지만 그랬다간 이내 그 공간에서 쫓겨나고 만다.
이처럼 도무지 알 수 없는 삶 속에서 오직 사랑만이 삶을 관통하는 하나의 서사를 남겨준다. 클로에가 남긴 그림 위에 덧쓰인 글들처럼 말이다. 클로에는 병으로 누워 있는 내내 콜랭과 자신이 행복했던 순간을 그림으로 남긴다. 클로에가 죽고 집이 완전히 무너져도 그 그림은 살아남아 삶의 서사 속으로 들어온다. 타닥타닥, 타자기 소리가 들린다. 타자기는 여전히 손에서 손으로 흘러가고, 우리는 여전히 무슨 문장이 적히게 될 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달라진 사실. 사람들은 클로에의 그림 위에 글을 쓴다. 어떤 내용이 적혀 있을지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그림 순으로 종이를 쭉 넘기면 멋진 서사가 하나 완성된다. 영원히 남게 된 콜랭와 클로에의 사랑 이야기가. 사랑이 행운이라 노래할 수 있는 이유는 이것이지 않을까.
무드 인디고(L'Écume des jours, Mood Indigo) | 미셸 공드리(Michel Gondry) |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