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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네이트 Dec 12. 2017

개미를 읽고 한마디...

                                  

79~83번째로 읽게 되는 책 입니다.


늦은 만남이었지만 베르나를 알게된 한 해로 '나무, 뇌, 파피용, 상상력 사전'에 이어 5번째로 '개미' 5권을 읽게 되었습니다. 무언가 알아가는 즐거움이 있었던, 그래서 더 알고 싶음이 커지게 하는 그런 시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렇게 5권을 읽었습니다.      

                              

                                                            

 베르나르의 책은 항상 그랬습니다. 소설이지만 소설에 머물지 않는, 철학과 과학적 사고의 틀속에서 헤메이게 하는 그런, 그리고 나서 나를 둘러보면 철학과 과학과 소설이 낯설어지는 그런 공간에 머물게하는, 어쩌면 그의 책을 읽게되는 것은 소주를 마시는 이치와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많은 이야기에 매료되어 점점 나를 잊고 상황에 내던져져, 한참을 헤메이다가 다시 돌아왔을때의 머리아픔이 남지만, 결국 또 다시 찾을 수 밖에는 없는 그래서 더 그를 찾게 되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베르나르의 글은 소주다. 또 다시 찾을 수 밖에 없으니...


 책을 읽으면서 드는 한 가지 아쉬움은 책의 출판 순서와 다른게 책을 읽다보니, 책에서 기존에 읽었던 많은 책들이 오버랩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책에서 '나무, 뇌, 파피용, 상상력 사전' 이라는 책을 보는듯한 느낌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이 작가가 대단히 영리한 사람이다는 느낌과 큰 구조를 가지고 글을 쓰고 있구나 하는 두가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책을 저자의 연대기 순을 보지 않는 것도 작가에 대한 빅피쳐를 볼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일 수 있겠다 싶기도 했습니다.


 1993년 개미 처음 개미가 그리고 1997년에 개미혁명이 쓰여졌다고 합니다. 2017년에 그의 책을 보면서 그의 인사이트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밑 그림들이 현재에 속속 들어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구글의 창업자, 허핑턴 포스트의 창업자가 이 책을 읽으면서 나름의 사업의 스케치를 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1997년에 이 책을 읽는다고 그런 밑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소설에서 말한 것들이 아주 유사하게, 그것도 대단히 큰 성공을 달리고 있는 것을 보면 놀람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처음의 3권이 이후의 개미혁명에 비해서는 더 좋았던듯 합니다. 일단 개미라는 동물과의 소통이라는 컨셉은 세상의 모든 독자로 하여금 흥미를 만들어 내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라는 책을 이야기의 흐름의 중요한 맥으로 놓은 것도 작가의 통찰력이나 소설의 구성을 만듬에 많은 시간을 소여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의 책을 보면 선득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흐려집니다. 방대한 지식을 모으고 그를 기반으로 스토리를 만들고, 스토리 속에 독자에게 주려는 메시지의 일관성을 유지한다는 것이... 반면에 개미혁명의 경우는 약간 정도 청소년을 위한 성장소설에 가까워 보였습니다. 


 인간의 진화라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인간의 진화는 이제 끝이 났을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이제는 과학의 발전속에서 인간이 이제 진화에 의한 적응이 아니라, 보조물에 의한 진보를 통한 문제해결 만이 남은 것은 아닌가 싶었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와 개미가 뒤 섞이는 듯 합니다. 급격한 진보를 통한 진화에서 우리는 인식할 수 없는 아노미에 빠져, 종의 연속성을 망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됩니다. 개미는 더 긴 시간을 자연과의 순응을 통해서 존재하여 왔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시간속에서 진화와 기술의 진보를 통해서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개미와 혹은 바퀴벌레와 같은 진정한 진화의 승리가자 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시간 흐름에 대한 예의를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문화라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문화라는 속성이 유지와 발전을 위해 나의 안락과 지속성을 위해 다른 것을 저버려도 된다는 것이 현재의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고 의지하는 인간의 문화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좀더 심각한 의심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사실이 어쩌면 시야를 개미로 바꾸는 순간 너무나도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문화라는 것이 혹은 정체성이라는 것이 대단히 위험한 것이구나 싶습니다. 전혀 의심도 하지 않고 살아온것이 더욱 놀랍기만 합니다.


 인간의 종교라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종교라는 것은 단 1분이라도 미래에 대한 바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현재로부터의 불안을 버리려 찾는 의지처인 것입니다. 이는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불확실성에서 기인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종교로의 귀의를 통한 잠시나마 안락함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라는 문화는 생각보다 큰 문제가 있는 듯 합니다. 고착화와 일반화로 모든 것을 간주해 버릴수 있기 때문입니다. 검증할 수 없는 고착화와 일반화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게끔 만들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근래에 회자는 욜로가 종교에 대한 반박일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미래의 불확실성 등에 대한 시기적 미룸이 아닌 지금의 생활을 만끽하라 하는 것이...


 기사라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 그 무수한 거짓에 감추어진 사실을 진실이라고 믿으면서 살고 있었는지, 진정한 소설가가 바로 기자였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기사를 읽고 이런저런 공감을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또 다시 보곤합니다. 책에서도 말했던 기사의 통제가 아닌 기사의 대중화를 통해서 더욱더 진실에 접근하지 못한다는 현실에 모든 인간이 직접적인 경험만이 살길인가 싶기도 합니다. 게다가 나의 문화가 옳다고 믿는 사실을 이젠 더욱더 쉬운 방법으로 주변에 퍼트릴 수 있는 현실이니, 이제는 모두가 철학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혁명이라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모든 승자의 논리가 바로 혁명이라면 혁명이라는 것이 실재할까 싶었습니다. 그러나 모두는 그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바램이 있기에,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하지만 존재하지 않기에 존해하는 것 처럼 보이는 문화, 종교와 무엇이 다를까 싶기도 합니다.


 역사라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역사라는 하나의 장편에 녹아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혁명과 문화와 종교와 역사가 객관화된 사실이 아니겠다 싶었기 때문입니다. 역사라는 것도 사실 승자의 독백이기 쉽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정보가 갖쳤고 현재는 정보를 알 수가 없는 상태에서 역사의 의미가 약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매번 시험을 통해서 역사를 읽게 됩니다. 과거제도를 통해서 어쩌구 저쩌구, 의미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역사책이 아닌 아버지의 혹은 아버지의 아버지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역사를 배워야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길은 많으니 꼭 그 길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주저리 주저리 길속에 길에 빠져버리고 만듯 합니다.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작자는 개미를 통해서 종교를 문화와 예술의 발생되는 과정을 그리고 이를 통해서 인간이 현재에 이루고 있음을, 그리고 그 현재에 이어질 미래라는 것을 명백히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개미와 인간, 혹은 인간과 자연의 조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하라리의 사피엔스에서 말하고 있는 돼지, 소, 닭이 떠오릅니다. 어쩌면 인간스스로도 편의와 경제라는 부지불식간에 돼지, 소, 닭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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