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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자 Dec 22. 2016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꼭 봐야 할 5가지 작품 2편

지난 편에 이어 5개씩 연재를 이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6. 중세 조각 전시관 (Medieval Sculpture Hall), Gallery #305


중앙 홀에서 2층 계단으로 올라가지 않고 1층 뒤편으로 넘어가면 중세미술관이 나옵니다. 1층 이집트관 혹은 그리스, 미술관을 보고 무기, 갑옷 전시관이나 유럽 조각관등을 계속 보며 이동하다 혹은 1층에 있는 식당을 이용하기위해 이 공간을 지나치는 사람이 많습니다. 조각작품들 뒤에 쇠창살같이 쳐져있는 저 공간은 뭘까요? 성가대석 칸막이 (choir screen)이라고 유럽의 성당에서 보이는 공간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있는 겁니다. 스페인의 밸라돌리드 성당 (Valladolid cathedral)에서 가져온 것으로, 중세미술관에 있지만 1763년에 만들어진 18세기의 유물입니다. 무게만 27,000kg (60,000 pound)로 높이는약 15미터 (52 feet),너비는 약12미터 (42 feet)정도입니다.

1763년은, 이번 대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플로리다주를 16세기부터 점령한 스페인이 영국에 할양한 해이기도 합니다. 그러부터 12년후 미국독립전쟁이 발발해 플로리다는 다시 스페인령이 됩니다. 플로리다가 정식으로 미국령이 되는건 1821년이나 되어서입니다.


1763년, 중국은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통치를 한 청나라 건륭제 치하였고, 조선은 영조36년으로 1년전인 1762년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기도 했죠.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서 2시간여 북쪽으로 차를 타고 달리면 로마 카톨릭성당인 밸라돌리드 성당 (Valladolid cathedral)이 나옵니다. 유럽의 가장 큰 성당을 목표로 15세기 말부터 지어지기 시작했고 밸라돌리드는 당시 스페인의 실질적 수도였습니다. 그러나 왕실이 새 수도인 마드리드로 이사하며 자금 부족으로 원래의 계획대로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성가대와 일반석을 구분하기위해 만든 칸막이는 1956년 코스모폴리탄, 하퍼스 바자, 엘르등의 여성잡지를 비롯한 많은 간행물을 출판하는 허스트 재단 (The Hearst Foundation)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기부한 것입니다. 1920년 무렵, 성당측에서 성가대 칸막이를 치우기로 결정했는데, 당시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 (William Randolph Hearst, 1863-1951, 허스트는 1941년 개봉한 영화 시민 케인(Citizen Kane)이 그의 삶을 모델로 한것으로 유명하죠) 가 이 소식을 듣고 구매하게 됩니다. 재밌는건 그가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 (이 때 필리핀과 괌이 미국령이 되죠)을 부추기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는 겁니다. 스페인과의 인연(?)은 이 성가대 칸막이를 구매하면서 계속되고, 그는 이 칸막이를 포장도 뜯지 않은채 브롱스의 창고에 20년이 넘도록 보관만 하고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시면 당시 스페인의 대장장이와 세공가들이 만든 정교한 창살 (grille) 디자인에 감탄하게 됩니다. 쇠창살 맨 위 중앙에는 십자가가 보입니다.


1957년 시작된 이래 매해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이 칸막이 앞에 크리스마스 트리가 설치되어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기도 하죠. 이 6미터 (20피트) 높이의 전나무로 만든 크리스마스 트리에는 예수탄생을 묘사하는 인형들과 천사들이 18세기 이탈리아의 나폴리 지역의 바로크양식 (Neapolitan Baroque)으로 만들어졌고 이탈리아식 분수와 로마 양식 사원들의 잔해가 보입니다. 동방박사 행렬과 마을사람들, 동물들까지 18세기 장인들이 만든 것으로 아주 재미있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매해 설치되어 크리스마스 음악도 나오고 때에 맞추어 점등식 행사도 있습니다. 보통 11월 말에 설치하니 한 번 가셔서 아래의 아기예수를 찾아보시죠.


나폴리와 스페인의 18세기 유물들이 연관성이 없어보이지만, 1734년부터 1759년까지 스페인의 카를로스3세 (Charles III, 1716-1788; 1759-88집권)는 나폴리의 왕이기도 했습니다. 카를로스3세의 어머니는 이사벨 디 파르네시오 (Isabel de Farnesio, Elisabeth Farnese, 1692-1766)로 파르마공국 (Duchy Parma)의 후계자로 모계게승으로 카를로스3세는 파르마공국의 공작(Duke of Parma)이기도 했습니다. 카를로스3세의 아버지인 필리페5세 (Philip V, 1683-1746)는 프랑스의 루이14세의 아들로 부르봉왕가 (House of Bourbon) 계승입니다.


지금도 이 칸막이가 있는 305번 방에 깃발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사진에 보이는 깃발은 스페인 왕실 문장으로 부르봉가문 (House of Bourbon)의 문장등 여러 가문의 문장 (coat of arms)이 합쳐진것입니다. 파란바탕에 노란 십자가가 보이는 부분이 부르봉가문의  앙주령 (count of Anjou) 문장입니다. 필리페5세가 앙주 공작 (Duke of Anjou)이었죠. 파란색과 노란색 사선으로 된 부분은 부르고뉴 공국 (Duchy of Burgundy)의 문장입니다. 이 부르고뉴 공국은 16세기에 스페인령이 되어 스페인왕실의 지배를 받습니다. 80년 전쟁(1568-1638)후 지금의 네덜란드가 독립국가(Dutch Republic)로 탄생하지만, 지금의 룩셈부르크, 벨기에, 프랑스 일부는 스페인 네덜란드 (Spanish Netherlands)로 머물게 됩니다. 노란바탕에 검은색 빨간색 사자가 있는 부분이 에노령 (count of Hainaut)의 문장으로 신성로마제국의 일부였던 스페인 네덜란드지역입니다. 이러면 또 합스부르크 가문 (House of Habsbourg)하고 연계됩니다. 결혼과 혈족으로 맺어진 유럽 왕실 가문의 역사이고 지금도 유럽 곳곳에서 저 문장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7.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방 (Frank Lloyd Wright Room) Gallery #745

지난 편에 소개해드린 미국관의 잉글하드 코트 (The Charles Engelhard Court)가 있는 미국관에는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Frank Lloyd Wright, 1867–1959)가 설계한 방을 보실 수 있습니다.

위의 사진에서 보이는 라이트가 디자인한 공간은 1912-1914년에 그가 미네소타주 와이자타 (Wayzata, Minnesota)에, 프랜시스 리틀 부부 (Mr. and Mrs. Francis W. Little)를 위해 지은 프레리 하우스(Prairie-style lake house)의 거실입니다.


프랜시스 리틀은 일리노이주 피오리아 (Peoria, Illinois) 출신의 변호사이자 전기/가스 회사의 사장이었습니다. 피오리아에 있는 그의 첫 번째 집 (1902년, 윗쪽 사진)도 라이트가 설계했고 그가 1908년 이 집을 팔고 미네소타로 이사해 두 번째 집 (아래쪽 사진)을 지을 때도 라이트가 설계했습니다.


1923년 프랜시스 리틀이 죽고, 그의 부인은 이 집을 딸 부부에게 주지만, 집의 관리, 유지를 감당할 수 없어서 1972년 딸 부부는 집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팝니다. 미술관은 집을 해체해서 거실은 지금의 미술관으로 가져와 설치하고, 나머지 부분들은 다른 미술관에 판매합니다.


미국의 가장 유명한 건축가 중 한 명인 라이트는 한국어로 낙수장 (Fallingwater)이라고 잘 알려진 펜실베니아 주에 있는 카우프만 저택 (Kaufmann Residence, 1936-1939년 완공)으로 유명합니다.

또 뉴욕에서는 구겐하임 미술관 (1959년 완공)의 설계가로 일본에서는 제국호텔 (1923년 완공)의 설계가로도 이름을 날렸습니다.

라이트가 프랜시스 리틀을 위해 지은 미네소타 저택의 거실은 가족들의 휴식공간이기도 했지만 음악회를 여는 공간이기도 해서 빛이 잘 들어오는 파빌리온 스타일로 설계한 것입니다. 거실의 창틀부터 참나무(oak)로 만든 가구까지 전부 라이트가 디자인한 것으로 건물의 안과 밖, 인테리어와 가구가 별도의 존재가 아니라 서로 어울리며 대화할 수 있는 “유기적 건축 (organic architecture)”을 강조한 그의 건축 사상을 볼 수 있는 공간입니다.  창틀과 천장의 선들 (grilles)은 식물 형태를 모티브로해서 디자인한 것으로 공간의 연속성 (spatial continuity)을 강조하며 창 밖의 자연과 거실 실내가 분리된 공간이 아니라 연속된 공간이길 바랬던 그의 아이디어가 담겨 있습니다. 일본 미술을 사랑했던 라이트는 꽃꽂이와 일본 판화들을 소품으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8. 밴덜린 파노라마관 (Vanderlyn Panorama) Gallery #735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방을 보고 근처의 735번 방에 가면 놀라운 파노라마를 보실 수 있습니다. 어디인지 알아보실 수 있으세요?

바로 베르사이유 궁과 정원 (Panoramic View of the Palace and Gardens of Versailles) 입니다. 미국의 신고전주의 화가 존 밴덜린 (John Vanderlyn, 1775–1852)이 1818년 경 캔버스에 유화로 그린 것으로 길이만 거의 50미터 (165 feet)에 달합니다. 그가 베르사이유 궁에 직접 방문해 많은 스케치를 해서 돌아와 완성한 것입니다. 부통령을 비롯한 유명인사와 친분이 있었던 밴덜린은 이 작품을 뉴욕 시청 근처에 작은 원형홀을 지어 전시할 계획이었습니다.

9년간 자신의 파노라마 작품 전시공간으로 쓰고 시청에 돌려 줄 계획으로 시작한 사업은 생각만큼 이윤을 내지 못했고, 계약을 연장하려던 노력도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밴덜린이 설계한 건물도 법원, 전시공간 등으로 이용되다 1870년 완전히 해체되고 그 자리에 시청은 트위드 법원 (Tweed Courthouse)을 짓습니다.

19세기 미국에서 파노라마는 공공예술이자 대중오락의 수단이었습니다. 지금의 영화 관람이나 유명 관광지 사진 관람 같은 것이었죠. 1780년대에 영국에서 발명된 파노라마는 원통형의 건물안에 설치해 실내를 어둡게하고 파노라마 부분만 빛이 들어오게 해 파노라마에서 보여지는 풍경에 집중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관객은 약간의 입장료를 지불하고 전세계를 여행할 수 있었던 겁니다.


밴덜린의 작품도 원통형태의 작품이었지만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는 두 부분으로 분리해 전시하고 있습니다. 밴덜린의 또 다른 유명한 작품은 미국의 국회의사당 (U.S. Capitol)의 원형홀에 가면 보실 수 있습니다. 콜럼버스의 상륙 (Landing of Columbus, 1842-47)이라는 작품으로 원래 5달러 지폐 도안으로 미국 의회가 그에게 의뢰한 작품이었습니다. 현재 5달러 지폐의 모델인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은 당시에는 생존인물이었죠.

밴덜린의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고 1852년 가난으로 고통받다 죽습니다. 베르사이유 궁 파노라마는 그의 사촌이 보관하다 딸에게 물려주고 딸의 사후에는 밴덜린의 고향인 뉴욕주 킹스턴 (Kingston, New York)에 있는 상원 박물관 (Senate House Museum)에서 소장하게 됩니다. 이 후 1956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기증되고 미술관은 이 작품을 위해 원형 갤러리를 만들어 전시하게 됩니다. 밴덜린이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그렸던 스케치들은 아직 킹스턴 상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습니다.


9. 무릎을 꿇은 하트솁수트 (Large Kneeling Statue of Hatshepsut), Gallery #115

이집트 미술사에 대한 강의를 하면 교과서에 나오는 하트셉수트 (Hatshepsut, 15-7-1485 BC)의 조각상은 여러 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인 무릎을 꿇고 있는 조각상 (ca. 1479–1458 BC)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사후세계를 믿었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피라미드나 스핑크스 등은 전부 죽은이를 위해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파라오가 살아생전 하는 가장 큰 프로젝트는 바로 본인 사후를 위한 준비입니다. 거대한 피라미드와 제사를 위한 사원이 단기간에 지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닌거죠. 이집트의 나일강 서쪽, 데어 엘 바흐리 (Deir el-Bahri)는 바로 고대 이집트 최초의 여성 파라오 하트셉수트를 위한 장제전 (mortuary temple)입니다. 장제전은 파라오가 죽은 후 묻히게 될 무덤 근처에 짓고 사후 신격화된 파라오를 위해 제사를 지내는 사원입니다.

왕들의 계곡 (Valley of the Kings)이라고 여러 파라오들의 장제전이 모여있는 근처에 있습니다. 원래 하트솁수트는 이 사원을 이집트 신들의 왕 아문-레 (Amun-Re, 원래 아문이라고 불리었으나 태양의 신 라 (Ra)와 융합되어 아문 라 (Amun-Ra) 혹은 아문 레 (Amun-Re)라고 불리게 됨)에게 바치기 위해 지었습니다. 나일강 건너편 카르낙 (Karnak)에 아문을 위한 신전이 있고, 1년엔 한번씩하는 축제 기간에 아문의 조각상을 배에 싣고 바로 이 사원까지 모시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신을 마중하기위해 도로에는 스핑크스가 줄을 서서 세워졌습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있는 무릎을 꿇은 하트솁수트상도 이 장제전으로 이어지는 통로에 놓여있던 여러 조각상들 중 하나입니다. 조각상을 보면 수염도 있고 신체적인 특징으로 봐도 여성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고대 이집트인에게 가장 이상적인 왕의 모습은 전성기의 젊은 남자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하트솁수트도 그 도상을 따라 만든 것입니다. 지난편에도 설명했듯이 고대 이집트인들은 자연적이거나 사실적인 재현이 아니라 이상적인 재현을 따랐음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죠. 파라오의 특징들인 가짜 수염 (false beard)를 하고 있고 쉔딧 (shandyt)이라고 불리는 킬트를 입고 있습니다. 무릎을 꿇은 자세는 하트솁수트가 아문 마트 (Amun Maat)에게 공양을 하는 모습입니다. 아문 마트 (Amun Maat)는 질서, 정의, 진실을 상징하는 신으로 본인의 통치기간을 이 아문 마트가 보살펴주기를 바라는 것이었죠. 손에 들고있는 것은 신에게 바칠 공양물이 담긴 그릇 (nu-pots)입니다.

장제전 도로에 있던 이 조각상은 1927-8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이집트 발굴 프로젝트 중 발견된 여러 조각상들 중 하나입니다. 가능한 한 현장에서 재조립해 가장 완성도가 높은 것은 카이로 (Cairo)에 있는 이집트 박물관으로 보내고 다른 조각들을 1929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으로 가져와서 조립한 것이 지금의 조각상입니다.

석고반죽으로 빈 공간을 채워가며 조립한 것이죠. 색깔을 잘 맞추어서 얼핏보면 눈에 띄지 않지만 자세히 보면 질감이 다른 부분들이 보이시죠?

하트셉수트는 고대 이집트 18왕조 (18th Dynasty)의 5번째 파라오였습니다. 18왕조는 투탕카문 (Tutankhamun), 투트모시스 (Tutmosis), 아케나텐 (Akhenaten) 등 고대 이집트 역사상 가장 유명한 파라오들이 있었던 왕조였죠. 그녀는 투트모스 1세 (Tutmose I)의 딸이었고 이복 남동생인 투트모스 2세와 결혼하여 왕비가 됩니다. 남편과 후궁 사이의 아들인 투트모스 3세가 왕위를 이어 받았을 때는 겨우 2살로, 하트솁수트가 섭정을 하게되죠. 그 후 20여년간 이집트를 통치하게 됩니다. 살아생전 엄청난 양의 조각상들을 만들도록 명령하여 현재 전세계의 많은 박물관에 하트솁수트의 조각상이 거의 다 들어가 있을 정도입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도 여러 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번 편에 소개해드리는 115번 방은 하트솁수트 방 (Hatshepsut Room)으로 12개의 조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브룩클린 미술관 (Brooklyn Museum)에 가시면 페미니스트 작가 주디 시카고 (Judy Chicago, 1939-)의 디너 파티 (The Dinner Party, 1979)라는 설치작업이 있습니다. 남성 중심의 역사 속에 잊혀진 여성들을 위한 저녁 식사 테이블을 만들고 버지니아 울프 등 39명의 여성을 위한 접시와 테이블보를 만들었는데 이 초대상에 하트솁수트를 위한 자리도 마련됩니다.

10. 고대 그리스 젊은 남성의 상 (Marble statue of a kouros), Gallery # 154

이집트 미술관의 반대편으로 가면, 고대 그리스와 로마 미술관이 있습니다. 많은 양의 조각상과 항아리 및 도기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미술사를 논할 때, 가장 먼저 배우는 남성상이 있습니다. 코우로스 (Kouros)라고 불리는 입상인데,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기원전 590-580년 경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코우로스는 받침대를 포함해 대략 2미터 정도로 꽤 큰 편입니다. 미술사학자들은 고대 그리스 미술을 대략 5개의 시기로 나누어서 정리하는데, 이 입상이 만들어진 시기는 아케익 시기 (Archaic period, ca. 650-480 BC)에 해당되고 이전의 추상적이고 기하하적인 묘사에서 사실적인 묘사들이 나타나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는 이집트 미술과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미술에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당시 나일강 삼각주와 레반트 (Levant, 지금의 팔레스타인,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지역)에서 활발한 무역 교류가 있었고, 동서로 뻗어있던 그리스 식민지 등, 고대 그리스인들이 다양한 문명과 접촉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 조각상이 있는 방은 아케익 시기의 작품들이 모아져 있는 방 (Archaic Room)입니다. 다리를 앞, 뒤로 간격을 두고 자세를 취한 것은 이집트에서 왕의 조각상에 나타나는 특징에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기원전 6, 7세기 고대 그리스는 폴리스 (polis)라고 불리는 도시 국가들 (city-states)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이 도시 국가들은 그리스 본토와 에게해의 섬들, 소아시아 (Asia Minor), 북아프리카, 시칠리아, 스페인까지 퍼져 있었죠. 이 방대한 도시 국가들을 묶어준 건 언어였고 올림피아와 델파이 같은 곳에 열렸던 페스티발 같은 축제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서정시의 전성기로 사포 (Sappho of Lesbo)같은 시인이 살던 시기이도 했고, 스파르타 (Sparta), 아테네 (Athens), 코린스 (Corinth)같은 도시들이 예술 중심지였습니다. 메트로폴리탄에 있는 남자 입상은 아테네가 있는 아티카 (Attica) 에서 만들어진 가장 초기의 대리석 조각상 중 하나였습니다. 기원전 6세기에 이르면 그리스 예술가들은 점점 더 사실적으로 인물을 묘사하게 되고, 코우로스 (Kouros)라고 불리는 나체 남성상과 코우레 (Koure)라고 불리는 옷을 입은 여성상들을 많이 만들게 됩니다. 코우로스 (Kouros)는 젊은이 (youth)를 뜻하며 젊은 남성상을 가리킵니다.


이 조각상들은 주로 신전 (sanctuary)에 세워 신에게 바치거나 묘지에 세워 묘비 (grave marker)로 쓰였습니다. 메트로폴리탄에 있는 코우로스는 젊은 나이에 죽은 아테네 귀족 남성의 묘비로 쓰인 것입니다. 실제 무덤 주인의 모습을 조각한 것이 아니고 이상적인 남성상을 조각한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코우로스는 계속해서 더 사실적으로 묘사되고 나중에 우리에게 훨씬 익숙한 근육질에 8등신 남성상의 시초가 됩니다. 왼쪽이 아테네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 있는 (National Archaeological Museum, Athens) 50년 후의 코우로스 (Anavysos Kouros)이고 오른쪽은 150년 후 폴리클레이토스 (Polykleitos)가 청동으로 만든 창을 든 남자 (Doryphoros, Spear Bearer)를 로마시대 대리석으로 복제한 작품으로 현재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 (Naples National Archaeological Museum)에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조각의 변천 과정이 보이시나요?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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