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소셜 딜레마'를 보고
의학적으로 중독이라는 것을 진단할 때에는 내성과 금단을 평가하게 된다.
여기서 내성이란 어떤 수준의 만족감을 얻기 위해 사용을 증가시켜야 하는 것을 의미하고, 금단이란 사용을 중단하거나 사용량을 줄였을 때 나타나는 발생하는 신체적 심리적 고통이 일상생활에 장애를 유발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야기의 중독자로서 착실한 삶을 살아오다 출산과 육아로 인해 TV를 켜지 않는 생활을 18개월째 강제 유지하게 되어버린 내가, 지독한 금단 현상과 증가한 내성으로 인해 스마트 폰이라는 새로운 중독 물질을 찾게 된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일이었다.
스마트 폰 속 SNS에는 소설이나 영화처럼 장시간의 노출 없이도 그만큼의 자극과 만족감을 충족시키는 이야기들이 무한했다.
그렇게 단 몇 초에 불과한 이야기들의 폭포를 맞으면서 결국엔 영화 한 편에 투자하는 시간의 몇 갑절을 흘려보내고는, 피곤에 찌든 눈과 경추를 주무르며 잠들곤 했다.
태어나보니 엄마가 스마트 폰 중독자인 나의 딸은, 당연하게도 스마트 폰에 환장을 한다.
부모에게 딱히 특별한 육아 철학 따위는 없었지만 어쩌다 보니 그 흔한 아기 상어와 뽀로로의 움직이는 실물 영상도 단 한 번 보지 못한 채 18개월에 진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식탁과 책장 위에 올려 둔 엄마 아빠의 스마트 폰에 접근하기 위해 언제든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질 준비가 되어있다.
오로지 잠금 화면의 암호 번호를 마구 눌러서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비활성화 상태를 만들기 위해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짧은 팔을 뻗치고 오동통한 발가락으로 까치발을 서는 모습은, 정말이지 중독자의 표본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아이 앞에서는 가능한 스마트 폰을 만지지 않으려 노력했는데 라는 변명. 영상 미디어의 직접 노출이 전혀 없었음에도 단순히 부모의 모습만 보고 이 정도의 강력한 집착이 가능한가? 라는 의문. 내가 출근했을 때 남편은 애랑 단둘이 대체 어떻게 하고 있는 거지?! 하는 의심.
그런 것들이 짬뽕이 되어 죄책감 비슷한 것으로 피어오를 즈음, 소셜 딜레마라는 다큐멘터리를 보게 됐다. (그걸 또 스마트 폰의 넷플릭스 어플의 자동 추천 메커니즘을 통해 시청했다는 게 좀 아이러니하긴 하지만 어쨌든.)
그리고 다큐멘터리 시청을 마치자마자 나는 모든 SNS 앱을 삭제했다.
상품에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면 당신이 곧 상품이라는 이야기, 스스로 학습하는 최적화의 알고리즘이 사회의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있다는 이야기, 인공지능은 결코 객관적이지 않으며 그것을 만들어 낸 실리콘밸리의 천재들조차 자신이 만들어낸 시스템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더는 그걸 통제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는 이야기, 그런 그들은 자식들에게 스마트 폰을 저녁 시간 이후에는 결코 허락하지 않는다는 이야기.
한 시간 반 즈음 러닝타임 동안 실제 실리콘밸리 IT 업계의 주역들의 고해성사처럼 진행되는 이 많은 이야기 중에 나의 가슴에 가장 묵직하게 남은 말은, 우리가 전례 없는 감정적으로 취약한 세대를 만들었다는 말이었다.
소셜 미디어의 사용이 폭발적으로 보편화된 시점이었던 2013년 즈음 미국의 10대 후반 소녀들의 자해로 인한 병원 입원이 3배 이상 증가했고 15~19세의 소녀의 자살률은 2010년에 비하면 70%가 증가했으며 10~14세의 경우에는 무려 151%가 증가했다.
Z세대로 불리는 이 세대는 역사상 처음으로 중학교 시절 소셜 미디어를 처음 접했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스마트 폰에 매달렸다.
가장 자아가 취약한 시기에 잘못된 미의 기준과 선정성, 폭력성, 그리고 가짜 뉴스에 무차별적으로 노출된 채 자라나는 것이다.
그 결과, 한 세대 전체가 더 불안해졌고 더 연약해졌으며 더 우울해졌다.
이런 통계 결과는 진료실에서 나이가 어린 여성들을 만나게 되는 내가 분명 체감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체중이 지극히 정상 범위임에도 향정신성 약품으로 분류된 다이어트 약물을 처방받기 위해 내원하고 지속적인 위장장애에 시달린다. 만성적인 불면과 스마트 폰 블루라이트의 장시간 노출로 인한 안구건조증을 갖고 있으며, 복용하고 있는 약물에 우울증과 수면제가 있는 사람들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문제는 그 나이대가 점차 더 어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정신과의 문턱이 낮아지고 해결하기 어려운 고통을 전문가가 처방한 약물의 도움을 받아 해결하려는 것은 긍정적인 징후다.
하지만 이 새로운 혼란과 흑백의 시대에 가장 연약한 소아, 청소년 세대가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나는 그 누구보다도 나의 딸이 강인한 사람이 되길 바란다. 위험을 감수하고 도전하여 실패하더라도 부디 우울에 너무 오래 침잠되지 않고 또다시 도전할 힘을 갖길 바란다.
하지만 앞으로 나의 딸이 자라서 첫 스마트 폰을 사달라고 할 때, 첫 SNS 아이디를 만들 때, 단순히 그런 것들로부터 사용을 제한하고 금지하는 것이 얼마나 그녀를 안전하게 할 수 있을까? 그 제한과 금지는 대체 언제까지 지속되어야 하는 걸까?
그런 고민을 하며 어쨌든 지금 내가 중독된 SNS부터 삭제하는 것이 가장 우선이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 달 정도가 지난 지금, 나는 조금 놀랍게도 아무런 금단 증상도 겪지 않았다. 총 스크린 타임은 20% 정도가 감소했다. 육아와 일의 병행으로 스마트 폰이 옷장 속에 처박혀 있는 것도 모를 정도로 바쁜 것 때문에 금단 증상을 느낄 새도 없었던 것이 주효했던 것 같지만, 어쨌든 지금까지는 변화에 잘 적응하는 중이다.
아직까지 딸의 스마트 폰 집착을 없애진 못 했다. 18개월밖에 안 된 브랜드 뉴 뇌라서 그런지 한번 각인된 것이 사라지는 데 36년짜리 중고보다는 시간이 좀 더 걸리는 게 아닐까 추측해본다. 아 참, 중독자 2호였던 남편이라는 장애물도 여전하다.
다만 머지않은 미래에 아이와 대화가 통하고 함께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할 수 있을 때가 오면, 모두의 스마트 폰을 모아 한구석에 치워놓고 어제 영화관에서 본 영화 이야기, 지난 방학에 놀러 갔던 여행지 이야기들을 하며 오래도록 수다를 떨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부디 내가 다시 행복한 이야기 중독자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그런 행복한 시간이 모두의 집안에도 가득하기를,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