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과 기대를 배우는 일
봄을 기다리는 계절, 씨앗 목록을 열심히 들여다보는 시간이 있다. 올해는 어떤 씨앗을 키워볼까. 작년에 실패했던 것을 다시 해볼까, 아니면 새로운 꽃을 시도해볼까. 정원이 가장 조용한 계절에 다음 봄을 상상하는 일.
파종 준비를 하는 시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계절이 된다.
정원을 가꿀 때 간편하게 모종을 사다 심으면 된다. 이미 어느 정도 자란 식물을 사서 정원에 식재하면 봄은 금세 화사해진다. 굳이 씨앗부터 시작할 이유가 없지만 5년째 파종을 반복하고 있다.
파종은 품이 많이 드는 일이다. 씨앗을 고르고 파종 시기를 계산하고, 적당한 온도와 적당한 물주기도 필요하다. 어느 정도 자라면 더 큰 화분으로 옮기고, 때가 되면 정원에 정식한다. 그 사이에 시들어버리거나 웃자라거나, 생각대로 되지 않는 일이 더 많다. 작은 씨앗이 모종이 되고 집안 많은 자리 차지해 난감해질 때가 있다. 그런데도 멈추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곰곰이 생각해본다.
작은 씨앗을 흙 속에 살짝 묻어부고 한동안 겉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흙 안의 씨앗은 그대로이고, 조용하고, 아무것도 올라오지 않는다. 그러다 자기 몸 안에서 큐싸인을 받으면 껍질이 불어나고, 작은 뿌리가 나오고 작은 잎이 올라온다. 흙을 밀고 올라온, 솜털이 가득한 연두빛 작은 떡잎을 발견하면 마음이 가득찬다. 가장 작은 것에서 받는 큰 기쁨. 그 매번 경험하는 일인데도 매번 놀랍다.
보이지 않는다고 멈춰있는 게 아니라는 것. 땅속에서 조용히 준비하던 씨앗이 어느 날 불쑥 올라오듯, 들리지 않는 내면에서도 무언가 쌓이고 있을 거라는 생각. 작은 점에서 시작되는 드라마틱한 성장, 파종을 반복하는 건 어쩌면 그 믿음과 성장을 매년 다시 확인하고 싶어서인지도 모른다.
씨앗에는 휴면이 있다. 조건이 갖춰져도 때가 될 때까지 스스로 기다리는 상태다. 살아있지만 발아하지 않는 것, 생장을 재개하기 위해 자기만의 신호를 기다리는 것. 많은 씨앗들은 가을에 떨어진 뒤 겨울의 혹독한 시간을 보내고, 태어날 큐싸인을 받으면 태어난다. 처음 파종을 시작 할 때, 그 사실이 낯설었다. 심었는데 왜 안 나오지, 혹시 죽은 건 아닐까 마음이 조급했다. 자기만의 속도로,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었다.
같은 식물의 씨앗이라도 발아 시기와 속도의 차이를 보고 있으면, 작은 씨앗들의 생존전략이 놀랍기도 하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것 같은 시간. 하지만 그 안에서 무언가 단단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휴면은 기다림이고 준비다. 서두른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 씨앗에게는 그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상담을 하다 보면 그 생각을 자주 한다. 이 사람은 지금 휴면 중인 거라고. 아직 자기다움의 시간을 기다리는 중이라고. 그리고 그 시간을 버티고 기다려주는 것, 자신이 어떤 씨앗이 될 수 있을지 자원을 찾아보고 가늠하고 그려보는 일 . 그리고 환경과 준비가 되면 자기 자신 속에서 큐싸인이 시작될거라고.
씨앗이 싹을 틔우려면 조건이 필요하다. 수분이 있어야 하고, 적당한 온도가 있어야 하고, 때로는 빛이 있어야 한다. 반대로 빛이 없어야 발아하기 좋은 씨앗도 있다. 아무리 좋은 씨앗도 조건이 맞지 않으면 싹을 틔우지 못한다. 반대로, 조건이 갖춰지면 아주 오래된 씨앗도 살아난다.
맞는 관계 •맞는 시간• 맞는 자리
씨앗에게 물과 빛이 필요하듯, 사람에게도 자기에게 맞는 조건이 필요하다. 자신과 맞지않다면 과감히 떨쳐버리는 일도 필요하다.
파종이 뭐길래 묻는다면
기다림과 기대를 배우는 일이라 대답할것 같다.
서두르지 말 것, 때를 믿을 것.
씨앗은 이 뻔하지만 자꾸 잊어버리게 되는 문장을 가르쳐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