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의 매력
영화 프로듀서 마흔 살 ‘이찬실’의 좌충우돌 성장담을 그린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2019)를 보다가 반갑고 놀라운 대목이 있었다. 찬실이가 낡은 라디오를 틀고 <FM영화음악 정은임입니다> 녹음테이프를 듣는 대목이었다. <정영음>이라 하면, 1992. 11. ~ 1995. 4. / 2003. 10. ~ 2004. 4. 에 방송될 때 많은 사랑을 받았던 영화팬들에겐 전설의 영화음악 방송이다. 찬실이가 버거운 꿈이 자신을 초라하게 한다고 생각하여 영화라는 꿈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 자신이 좋아했던 영화음악 방송은 영화를 좋아했던 찬실의 초심을 일깨워준다. 소박하지만 꾸준히 꿈을 지켜온 그녀가 살아온 삶 안에서 그 마음은 여전히 빛나고 있음을.
애정 하는 DJ 유희열의 삽화집 <익숙한 그 집 앞>을 보면, 전설의 DJ인 그 역시 어린 시절 라디오에서 ‘한경애의 영화음악’을 들으며 영화음악가의 꿈을 꾸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좋은 라디오가 좋은 DJ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찬실과 희열님처럼 거창하지 못하지만 내게도 라디오의 첫 기억은 mbc라디오의 <영화음악>이다.
MBC FM4U의 <영화음악>은 영화 음악 전문 라디오 프로그램으로서, 1975년에 방송을 시작한 만큼 역사가 긴 프로그램이지만 중간에 시간대 이동과 종방이 있었다. <영화음악>은 정영음, 배영음, 홍영음...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서도 침묵하지 않는 라디오였기 때문에 MBC 라디오가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DJ와 프로그램 시간이 숱하게 바뀌었다. 많은 부침에도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세월을 품은 라디오이다.
‘라디오’란 방송국에서 발신하는 전파를 잡아 이것을 음성으로 복원하는 기계를 뜻한다. 라디오가 왜 좋을까 곰곰 생각해보니, 누군가 이 시간에 같은 음악을 듣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가 아닐까.
라디오의 매력은 같이 동시간대에 모여서 메시지와 사연을 남기면서 같은 음악, 같은 이야기를 듣는 재미에 있다.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공동체라는 원형을 그려본다면 라디오가 아닐까. 모닥불을 빙 둘러싸고 앉아서 같이 음악을 듣고 이야기하는 정다운 풍경이 그려진다. 신기한 점은 라디오는 애정을 두면 약속한 것처럼 그 시간을 기다리게 된다. 라디오를 한 번도 안 들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듣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FM 영화음악>은 나의 라디오 청취의 과거와 현재, 첫 시작점이었다. 그 시간은 어떤 터널의 시작과 끝, 열정이 싹을 틔우고 잎을 떨구는 시기였다. 한 시대가 저물었다고 이렇게 말하는 나는 찐 라디오 팬은 못 된다. 지금도 예전 라디오 방송을 팟캐스트나 다시 듣기로 꾸준히 듣는 소리 없는 애청자들이 많다. ON AIR의 불이 꺼져도 그 자리를 늘 지키는 이들이 있다. 내가 떠나 있었던 것뿐, 그들은 떠난 적이 없다.
버스 운전사, 가게 하시는 분들처럼 24시간 작업시간에 늘 라디오를 듣는 분들의 부지런한 성실함에 견줄 수 없지만, 귀퉁이를 접어둔 나의 라디오 추억들을 다른 이들과 나누고 싶다. 내가 보낸 주파수에 누군가 응답을 해준다면, 다른 추억들이 있는 청취자들이 모여서 다 같이 자신의 라디오 이야기를 웅성웅성하는 곳에 끼어들어 언제 떠났었냐는 듯 시치미 딱 떼고 즐겁게 라디오 이야기를 하고 싶다.
영화나 책 등 작품을 읽어낼 때 작가가 만든 의미를 넘어서는 관객의 해석을 강조하는 인터뷰를 보면 그래도 작가가 마음에 품고 있을 정답이 궁금한 생각이 든다. ‘치, 좀 가르쳐주지.’
어느 날 문득 라디오를 들으며 생각했다. 음악, 코너, DJ라는 틀(하드웨어)이 있지만 스튜디오를 채우는 것(소프트웨어)은 청취자들의 신청곡과 이야기이다. ‘우리 프로는 청취자가 있어서 존재한다’는 DJ의 말이 내겐 전혀 빈 말로 들리지 않는다. 영화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남아있는 한, <영화음악>은 끝나지 않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