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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Sep 04. 2023

여름밤의 달리기

달리는 사람만이 아는 기쁨들

1. 달리는 사람이 되기까지


살아생전 꾸준히 해온 운동은 전무했다. 학생 때 체육시간에 피구를 하게 되면 미련 없이 제일 먼저 공에 맞아 코트 밖을 나갔고, 마지막 등산은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던 내가 길 위를 달리기 시작한 지 꼬박 2개월이 되었다.


처음 달리기를 시작한 건 정신이 피폐해지고 심각한 우울감에 빠졌던 때였다. 몇 년 전 무더웠던 한여름 온몸이 물에 젖은 스펀지처럼 느껴져 바닥에 축 늘어져 있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시기에 누군가 내게 말했다.


“10분이라도 좋으니 신발 끈 동여매고 그냥 한 번 달려보세요. 뛰고 나면 한결 나아질 거예요.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 의심하지 말고 그냥 해봐요.”


그때에 나는 반신반의를 가늠할 겨를도 없이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나섰다. 이게 마지막 시도라고. 이것까지 해보고 안되면 상담을 통해 전문가에게 도움을 구해야겠다 생각하면서. 첫 러닝의 기억은 ‘아, 내가 1km도 쉬지 않고 뛸 수 없는 체력이구나. 도망가야 할 일이 생기면 붙잡히는 건 순식간이겠다. 너무 힘들다.’였다. 다음 날 양쪽 다리와 팔 근육이 저릿저릿했지만 앞만 보며 달리면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짧은 순간에 부정적인 생각을 멈출 수 있다는 발견 이후 몇 차례의 달리기를 하며 조금씩 수면 위로 올라올 수 있었다.


그 해의 경험을 통해 나는 날씨와 컨디션이 직결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여전히 트라우마 같은 후유증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올해는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잘 보내고 싶어 더욱 만반의 준비를 했다. 평소 건강하고 단단한 사람이라 생각했던 사람들의 공통점을 찾기로 했다. 그들의 일하는 시간대, 하루 몇 시간 일하는지, 식습관은 어떻게 되고 운동은 뭘 하는지 관찰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들은 모두 ‘러너’였다. 대표적인 인물로 일본의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한국의 좋아하는 에세이스트 임경선. 심지어 SNS에서 유심히 지켜보는 인플루언서와 드라마 <런온>의 기선겸까지. 그렇게 나는 좋아하는 인물들이 지닌 체취를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 뛰기 시작했다.   


2. 결과가 아닌, 과정의 재미


가벼운 운동화와 에어팟, 휴대폰만 있으면 준비 끝. 발 닿는 곳 언제 어디서나 내가 원하는 때에 달릴 수 있는 심플함이 좋다. 잡생각에 복잡하다가도 호흡에만 집중해 달리다 보면 머릿속 흙탕물들이 가라앉는 개운함이 좋다. 지면에 발을 내딛으며 앞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 고요히 한 곳을 응시하는 명상과 닮았다.
-7월 어느 날 적어 두었던 날것의 기록


내가 가장 처음 느낀 달리기의 매력은 ‘심플함과 고요함’이었다. 파트너를 구하고 약속을 정하는 번거로운 과정이 없고,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장소에 가서 몸을 움직이면 되는 단순함. 다른 이와 겨룰 필요도 없고 나의 만족감은 어제 보다 많이 달렸거나 빨리 달렸거나 명확하게 드러나는 숫자라는 기록을 통해 비롯된다.


p.34
나는 어느 쪽이냐 하면,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다. (생략) 혼자 있는 것을 별로 고통스럽게 여기지 않는 성격이다. (중략)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은 변함없이 항상 내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하루에 1시간쯤 달리며 나 자신만의 침묵을 확보한다는 것은, 나의 정신 위생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작업이었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그와 유사하게 나 역시 혼자 있는 것이 불편하지 않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고요의 시간이 확보되어야만 나로 존재할 수 있는 유형의 사람이다. 내겐 책을 읽고 일기를 쓰는 것이 채움의 영역이라면 에세이를 쓰거나 달리기는 비움에 해당된다. 여름밤의 달리기를 하며 두 선상을 왔다 갔다 하며 밸런스를 유지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또 다른 매력은 역설적이게도 내게 달리기는 ‘무용의 시간’이라는 것이다. 장기적으로 실력 향상을 위해 기록을 매일 체크하지만 숫자에 연연하지 않는다. 매일 뛰는 것도 아니고 일주일에 2-3번 시간과 날씨가 허용하는 때에 나간다. 몸이 가벼운 날엔 스퍼트를 올리는 구간에서 전력질주를 하기도 하지만 지치고 힘든 날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냥 걷는다. 숨이 잦아들 때까지. 그러다 보니 결코 잘 달린다고 할 수 없지만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꼬박꼬박 스토리에 올린다. 내겐 오늘 하루 짧더라도 나를 위한 침묵의 시간을 가졌다는 사실의 기록일 뿐이다.   


3. 건강한 선순환


자신의 회고록이라 말하는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은 건 2014년이었다. 그때는 하루키라는 사람을 이해하고 싶어 읽었던 책이었는데 10년 가까이 지나 이제야 달리기를 통한 하루키의 언어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에 있다.


p.73
내가 이렇게 해서 20년 이상 계속 달릴 수 있는 것은, 결국은 달리는 일이 성격에 맞기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그다지 고통스럽지는 않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좋아하는 것은 자연히 계속할 수 있고, 좋아하지 않는 것은 계속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것 외엔 덜어내길 추구하며 단순하고, 정갈하게 살고자 하는 그의 태도와 내가 맞닫아 있어 달리기에 매료된 것인지, 아니면 달리는 행위를 통해 느낄 수 있는 감각들이 나를 그렇게 만드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제 나는 달리기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러니 계속 오래, 잘해나가고 싶다. 사는 동안 마라톤에 나가보고 싶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내가 5km 기부 마라톤을 힘차게 뛰어보고 싶어 진다.


스토리에 매번 하트로 응원과 지지를 남겨주는 친구들과 자극이 되어 뛰고 싶어 진다는 반응이 돌아올 때면, 내가 좋아하는 인물들이 달리기를 통해 그들이 전하고자 했던 에너지를 이제 나의 언어로 전하면서 건강한 선순환이 이뤄지는 것 같아 즐거움이 배가 된다. 자, 날도 선선해졌으니 이제 여름밤의 달리기를 지나 사계절의 달리기를 향해 나아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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