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슬 Apr 02. 2024

보랏빛으로 빛나던 시절

당신의 가장 빛났던 시절은 언제였나요?

2016년 그 해 초여름은 내게 청량한 공기와 해질 무렵 보랏빛 하늘의 이미지로 남아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타기 전날 밤 아쉬움을 뒤로한 채 어슬렁 거리며 산책을 나갔다. 밴쿠버에 머무는 동안 가장 좋아했던 곳들을 천천히 걷다 마주한 다채로운 보랏빛의 풍경을 보며 직감할 수 있었다. ‘아, 지금 이 하늘 아래에서 느끼는 아쉬움, 설렘이 뒤섞인 감정을 다시 만날 순 없겠구나.’ 그래서 이 순간은 찰나에 스쳐 지나갈 테지만 마음에 오래오래 새겨두기로 다짐했었다.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뒤늦게 떠난 짧은 어학연수였다. 직장인 3년 차를 꼬박 채우고 28살이 되어 가진 돈을 탈탈 털어 떠났다. 어느 날 만약 내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다면 가장 후회할 것을 떠올리고 나니 가야 할 곳이 뚜렷하게 보였다. 그러니 20대 후반이라는 나이도, 다녀오면 비어있을 내 자리도, 다시 0이 되는 통장 잔고도 아쉽지 않았다.


낯선 나라에서 온전히 혼자인 내가 좋았다. 언어의 배움을 목적으로 향한 여정이었지만 침묵이 주는 고요함이 좋았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곳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어 좋았다.


유학 온 20대 초중반의 한국 대학생들과 수업 듣고 스터디하며 월-금을 치열하게 살아내고 금요일 밤 시끌벅적한 pub에서 우리끼리 왁자지껄 웃고 떠들던 그 시간이 참 귀하게 여겨져 우리는 자주 행복하고 감사했다. 나이도 사는 곳도 제각각인 우리가 어쩜 이렇게 타지에서 만나게 된 걸까 라는 물음에 ‘만나게 될 인연’이라 답하곤 했다.


얼마 전 서울에서 오랜만에 그 시절을 함께 한 친구들을 만났다. 햇수로 어느덧 9년. 이 날도 몇 년 만에 만났는데 어제 만난 듯 익숙한 분위기에서 이제 사회초년생을 지나 10년 차를 향해 가고 있는 어엿한 직장인이 되어 일과 결혼, 커리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집에 가는 길 친구에게 말했다. “00야, 나는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시기였던 것 같아. 마냥 즐겁고 모든 게 감사하고 그랬어.” “언니, 나도 그래. 그때 우리 매일이 진짜 재밌었지. 앞으로도 밴쿠버 열심히 그리워하면서 또 새로운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자!” 서울역에서 만나 서로 다른 방향으로 헤어져 귀가하는 길 또 다른이에게서 “멀리 있어 자주 보지 못하지만 항상 이렇게 따듯한 마음 자주 나눌 수 있으면 좋겠어요. 우리 오래 봐요.”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그 시간을 건너와 보니 내게 그 시절이 빛나고 충만하게 느껴지는 건 함께 했던 참 좋은 사람들 덕분이라는 생각을 한다. 우리가 공유하는 과거도, 현재의 시간도 소중히 여겨주는 마음들이 모여 은은하게 빛나는 시간들을 만들어가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여름밤의 달리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