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향은 섬. 짠내 나는 바다에서 뻔한 육아를 거부한 엄마 덕분에 나는 ‘곱디고운 공주’처럼 자랐다.
참하고 다소곳한 긴 머리의 라푼젤 같은 아이, 동네에서 유명한 긴 머리 소녀.
감사하게도 트레이닝복 대신 분홍 원피스, 고무신이 아닌 에나멜 구두, 나랑 닮은 금발의 긴 인형을 품에 안고 다닌 나는 꽤 주목받았다.
우리 엄마는 내가 그렇게 영원히 라푼젤로 자라길 바라셨다.
그런데 동화 속 라푼젤이 호기심이 왕성한 아이란 걸 엄마는 모르셨나 보다. 머리만 긴 게 아니라 나는 라푼젤의 무모한 호기심까지 쏙 빼닮아 있었다.
사건의 시작은 평범한 어느 일요일. 교회 목사님의 설교가 내게 도화선이 될 줄이야.
그날은 목사님이 삼손과 데릴라 이야기를 해주셨다.
“삼손은 머리카락을 자르면 힘을 잃는다는 비밀이 있지요.”
귀가 번쩍 띄었다.
‘뭐라고? 머리카락에 힘이 있다고? 그런데 그걸 자르면 힘을 잃게 된다고?’
목사님의 한 줄이 호기심의 불을 댕겼다. 내 안에 괴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면서 아직 어려서 그 힘이 발현되지 못했을 거란 생각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머리카락을 자르면 내가 어떤 변신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상상에 이르자 갑자기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하늘을 날거나, 혹은 투명인간이 될지 모른다는 기대감에 집으로 내달렸다.
‘가위부터 찾자!’
가위를 쥔 나는 동네 오빠 셋을 불러 모아 옥상으로 올라갔다.
“오빠야, 목사님이 그러는데 머리카락을 자르면 변신을 한단다.”
“뭐라카노.”
“아니~~ 삼손이란 사람이 머리가 나처럼 엄청 길었는데, 머리를 잘라서 힘이 없어짔단다. 목사님이 그랬다.!”
“근데, 뭐, 와? 우짜라꼬?”
“내 머리 있다 아이가. 내가 뭔가 비밀을 있을 것 같다. 짤라바라.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다니깐!”
옥상에 모인 초등학생 아니 국민학생 남학생 셋은 갑자기 전의에 불탔고, 셋이서 번갈아 가면서 내 머리카락을 잘라대기 시작했다. 마치 추석 벌초하듯이...
그들은 꿈꿨으리라, 우리 동네 라푼젤에게도 동화 같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그리고 그 뒤엔 자랑스러운 동네 오라비 셋이 있었다는 흥분도 함께.
머리카락은 한 움큼씩 잘리고, 길이는 점점 짧아졌다.
처음엔 기대와 설렘 호기심과 궁금증으로 심장이 쿵쾅댔다면, 어라. 잦아지는 가위질에 커지는 불안과 당혹스러움.
뭔가 알 수 없는 기운에 심장이 벌렁대기 시작했다.
“어, 뭐꼬... 어... 이상하다?”
“정아, 니 괘안나? 뭐 느껴지는 거 없나?”
오빠들의 동공 지진에 나는 양볼에 경련이 일고, 슬그머니 주먹에 식은땀이 맺혔다.
“오... 빠야...?”
그랬다. 뭔가 일이 점점 이상해지고 있다.
‘이게.. 아인데....’
본능적으로 ‘사건이 터진’ 걸 감지한 동네 오빠 셋은 “에이, 가자.. 모르긋다.”라며 옥상을 뛰어 내려갔다. 나만 덩그러니 옥상에서 바람에 나부끼며 흩뿌려진 라푼젤의 삼단 같은 머리카락 사이에 남겨지게 되었다.
‘아.... 난 삼손이 아니었구나.'
그랬다. 그날 난 삼손이 아니고, 더 이상 동네 라푼젤도 아니란 걸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리고 실망과 불안 속에 한참을 옥상에 숨어 있었지만 동네방네 나를 찾던 엄마의 레이더에 결국 걸렸다.
온 동네가 떠나갈 듯한 엄마의 비명과 함께 자랑스러운 엄마의 라푼젤은 그렇게 사라졌다.
그날 밤, 나는 동네 미용실로 끌려갔다.
동네 아줌마들과 엄마의 엄청난 잔소리 속에서 ‘삼손을 꿈꾸던 라푼젤’은 ‘몽실이’로 다시 태어났다.
나는 다짐했다.
목사님 말은 다시는 안 믿을 거야.
그리고 엄마가 라푼젤처럼 머리를 기르게 한 비밀도 알았다.
절대 짧은 머리는 어울리지 않는 사각얼굴형이란 걸.
엄마 말은 진리지, 암. 들어야 해.
그렇게 꿈은 사라졌다.
안녕, 삼손.
안녕, 라푼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