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은 인연이 되다
프리랜서 강사로서 10년 가까이 아이들과 보드게임을 함께해 왔습니다.
하지만 의외로, 저는 승부욕은 있어도 순발력이나 전략에는 약한 편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혼자서 하는 퍼즐이나 문제풀이형 게임을 즐기곤 하죠.
그런 제가 여럿이 함께하는 보드게임을 ‘업’으로 삼게 된 건, 참 뜻밖의 계기 때문이었습니다.
한편의 인생 수업이자, 씁쓸한 통과의례 같은 경험이었죠.
지금으로부터 약 15년 전.
큰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둘째도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조금의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 무렵, 예전에 알고 지내던 지인이 강사 일을 다시 권유했고, 저는 그녀를 통해 한 교육원 원장을 소개받게 되었죠. 취업은 거의 확정된 분위기였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인사를 드리러 갔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솔깃한 제안을 받았습니다.
“부원장으로 일하시고, 교육원에 투자하시면 수익금의 일부를 드릴게요.”
그 교육원은 학원뿐만 아니라 어린이 신문사, 성인 대상 평생교육기관까지 운영하는 큰 규모였기에, 저는 기회를 잡고 싶었습니다.
한 달 고정 월급 대신 투자 수익.
평범한 강사가 아니라 '파트너'가 되는 느낌이랄까요.
그렇게 3천만 원이라는 큰 돈을 투자하며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땐 정말 세상을 몰랐던 거죠.
기본적인 매출, 수익구조, 계약서의 내용조차 제대로 따지지 않고 사인을 했습니다. 결과는 처참했어요.
수익은커녕 월급도 없었습니다.
"투자자이니 수익이 없으면 당연히 받을 게 없다"는 논리였죠.
문제가 있다는 걸 한 달 만에 깨달았고, 돈을 돌려달라고 요구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그곳을 나오는 데 3개월, 돈을 되찾기 위해 보내야 했던 1년이 넘는 시간.
생전 처음 내용증명이란 것도 써봤습니다.
결국 원금은 끝내 다 회수하지 못했지만, 인생 공부는 아주 쓰고 맵게 했습니다.
무엇보다 충격이 컸던 건, 그 일을 소개해준 지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예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고, 이번 일이 처음도 아니었죠.
하지만 저는 그때까지도 "설마, 설마"라는 순진한 마음으로 그녀를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녀가 소개해주는 사람, 인사시켜주는 모든 곳에서 문제가 생겼고, 그녀 자체가 여러 사건에 얽힌 사람이란 걸 알게 되었어요.
나는 너무 순진했습니다.
부모님 그늘 아래서 고생 모르고 자라온, 말 그대로 ‘온실 속 화초’였죠.
이 사건은 저에게 사람에 대한 공부, 인생에 대한 공부를 안겨준 큰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보드게임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냐고요?
잠깐이나마 그 교육원에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창의사고력 수업’을 진행했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보드게임을 새로운 교육 아이템으로 활용하겠다는 소문을 들었죠.
“그래? 그렇다면 내가 먼저 해보지.”
그들을 이기고 싶다는 마음, 복수심에 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제게 보드게임은 부루마불 수준의 추억뿐이었고, 전략이나 센스는 여전히 부족했죠.
하지만 보드게임이 아이들에게 교육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이후 저는 매주 서울을 오르내리며 국내 보드게임 회사의 모든 과정을 섭렵했고, 비용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나하나 배워갔죠.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됐던 저였지만, 보드게임은 신기하게도 저를 사람들 속으로 데려갔습니다.
보드게임은 마음을 열지 않으면 플레이할 수 없습니다.
협력하지 않으면 팀에 누를 끼치고, 전략 없이 움직이면 흐름을 깨뜨리죠.
그러면서 제가 점점 치유되고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사람과 어울리는 법을 다시 배웠고, 승리의 기쁨 속에서 ‘내가 쓸모 있는 존재’라는 감각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보드게임은 단순한 창의사고력 도구가 아니었습니다.
그 안에는 사람을 이해하고, 마음을 나누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점차 교육적 기능을 넘어서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어졌습니다.
그렇게 ‘보드게임 강사’라는 직업이 제 삶이 되었고, 전국을 다니며 아이들과 어른들에게 마음을 나누는 수업을 진행해왔습니다.
코로나 시기에는 온라인 수업으로도 영역을 넓혔죠.
복수심으로 시작한 보드게임.
이제는 저를 살려낸 치유의 도구가 되었고, 긴 시간 함께했던 소중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전, 드디어 보드게임과 이별을 하게 되었습니다.
손에 쥐었던 게임들을 모두 정리하고, 가슴 한쪽이 휑한 기분으로 그들을 떠나보냈습니다.
10여 년의 시간이 날아간 것 같았지만,
그래도 참 좋은 사람에게 잘 전해졌다는 마음으로 위로해봅니다.
처음은 복수의 마음이었지만,
결국 보드게임은 저를 회복시켰고,
사람을 다시 신뢰하게 만들었고,
마음을 어루만지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만남은 ‘잘못된 만남’이 아니었다고.
보드게임, 안녕.
그리고 내 지난 시절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