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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니 Feb 11. 2016

[오키나와 여행] 비 내리는 나하시에서

오키나와 여행 4일째, 비가 왔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서점에 들렀다.


2015년 12월 14일 월요일


도카시키섬에서 다시 오키나와 본섬으로 들어왔다.


여행 4일 째는 조금 쉬어가는 날이다.
낙도에 다녀왔고, 자연스럽게 비가 왔다.


아침의 아하렌 비치. 영업 시작 전의 고양이들이 아직 잠에 덜 깬 채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언젠가 다시올 땐 더 오래 머물 수 있길.
도카시키항의 대합실. 이곳이 다 차는 풍경은 태풍이 여러날 계속 되어도 보기 힘들 것 같다.
쾌속선의 요금은 2490엔. 10엔을 에누리 받은 기분이다.


오키나와 여행의 변수는 다름 아닌 날씨다. 오키나와로 떠나기 전 한 달 내내 오키나와 날씨를 지켜봤는데, 대체 이 곳은 예보가 왜 있는지 모르겠을 정도로 날씨가 변화무쌍했다. 일주일 내내 비가 온다고 해서 우산을 챙겨놨는데, 그다음 주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예보에 다 해가 반짝 떠있다. 그리고 그다음 주에는 흐리다가 비가 오다가 해가 뜨다가 또 비가 오다가......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난감하다. '섬이니까'라고 하면 모든 게 용서될까. 흔히 말하는 편한 업무란 표현으로 '꿀보직'이라는 말이 있는데, 오키나와 현지에서는 이런 대화가 이루어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 이번에 오키나와 지방 기상청 들어갔어."

"우와 꿀보직이네. 거기서 뭐해?"

"응, 자리에 앉아서 오리온 맥주 마시다가, 가끔 랜덤으로 날씨 어플을 돌리면 돼."


어쨌든 오키나와로 떠날 땐 선글라스와 우산을 둘 다 챙겨야 한다는 말씀. 물론 나하에 돌아온 오전엔 해가 쨍쨍했다. 나는 신이 나서 숙소에서 자전거를 다시 빌렸다. 자전거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내일이면 오키나와의 북쪽으로 떠나야 하니까.


타코라이스를 먹지 않으면 오키나와를 맘편히 떠나지 못할 것 같아.
왜 그런 하찮은 생각에 사로 잡혀서 소중한 한끼를 날렸는지 모르겠다. 타코라이스는 그냥...... 강남에 더 맛난 곳이 있다.


식사를 하고 나니 본격!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나하 국제거리를 제대로 돌아보지 못한 것 같아 이 근방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본격! 쇼핑을 시작한다. 동전 파스라든가 휴족시간이라든가 하는 일본 쇼핑의 정답 아이템 같은 건 별로 관심이 없다. 평소에도 쓰지 않으니 말이다. 만약 딱 한 가지 카테고리만 쇼핑할 수 있다고 정해진다면 나는 주저 없이 문구류를 택하겠다. 이건 꽤 괜찮은 장사다. 쫙쫙 펴지게 제본이 잘 된 노트, 쓰임새별로 다양한 펜들. 게다가 화장품이나 옷을 사는 것보다 죄책감이 덜하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장점이다. 이번 일본행에서는 아예 몇 가지 펜만을 노렸다. 일본에서는 캘리그래피용 펜이 아예 한 코너를 차지할 정도로 수요와 공급이 많은데, 이 펜은 드로잉용으로 상당히 훌륭하다. 캘리그래피용이므로 선의 굵기가 일정하지 않고 더 자유롭게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충전용 만년필과 만년필 카트리지. 역시 너무 가볍지도 않으면서 부담되지 않은 선을 쓸 수 있어 드로잉 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오, 그리고 이번 여행의 득템 아이템은 일력이었다. 바로 그 일력 맞다. 날마다 하나하나 뜯어 쓰는 전화번호부같이 두꺼운 달력 말이다. 일력은 쓰임새보다는 디자인 때문에 꼭 갖고 싶은 것이었는데 아무리 찾아도 다른 계절에는 찾을 수가 없었다. 이번엔 12월에 간 덕분에 일력을 살 수 있었다. 큼직한 것으로 들고 오고 싶었으나 무게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작은 사이즈를 들었다. 배낭을 메고 온 이 여행에 왜 이렇게 무거운 것들만 사게 되는지 참.


시장거리. 수산물로 유명한 마키시 공설시장도 이 시장 안에 있다.  
'생선 가게의 고양이'란 말은 역시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뭔가 모르게 당당한 뒷모습.


이것저것 물건을 가방에 차곡차곡 쟁인 다음 용기를 내어 시장으로 향했다. 이때까지 살면서 '시장'이란 단어와 '용기'란 단어를 함께 사용한 일은 처음인 것 같다. 그건 다름 아닌 내가 스스로 이번 여행에서 정한 미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미션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서점 울랄라에 가서 책에 저자의 사인을 받기.'였다. 서점에 책도 아닌 저자가 있겠느냐만은 다름 아닌 서점 주인이 바로 <오키나와에서 헌책방을 열었습니다> 저자였으므로, 한국어판 책을 들고 서점을 찾아갔다.


서점 근처에 자전거를 끌고 가면서도 '글을 읽어보니 까칠한 사람 같았는데 실례가 되면 어쩌지.', '혹시 주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대신 가게를 보고 있다면.', '마음에 드는 책이 없으면 사인만 받아도 되려나.' 등등 도움될 것 없는 말풍선이 머리 위로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면접 보러 가는 길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왜 이렇게 서점까지 가는 길은 짧은 건지 순식간에 도착해 버렸다. 입구에 자전거를 세웠는데, 주인장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더니 자전거는 거기에 세우면 안 된단다. 그, 그럼 어디에 세워야 하나요. 맞은편에 난 좁은 골목길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나는 정말 완전히 기싸움에서 져버렸다.


내가 왜 이런 미션을 스스로에게 주었을까. 책이 눈에 하나도 안 들어왔다. 그리고 서점은 정말이지 작은 곳이었다. 주인과 나와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시장통이지만 내가 책장을 넘기는 소리까지 다 들릴 정도다. 중고 그림책을 들었다 놨다 하다가 친구에게 선물하면 알맞을 것 같은 책을 한 권 고르고, 계산대로 갔다. 역시 너무 가까워 책장에서 몸만 돌리면 바로 계산대다. 수줍게 고른 책을 내밀고, 한 권을 또 내밀었다. 한국에서 가져온 책이다. 사인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저자의 눈이 동그래졌다. 똑같은 책이 울랄라에도 있었다. 한국어 판이군요. 저희도 가지고 있어요. 네 전 한국에서 가지고 왔지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주신다. 사인도 받고, 거스름돈도 받고, 받을 건 다 받았다. 그래서 나는 허겁지겁 엽서와 스티커를 손에 쥐어주었다. 좋은 건 아니지만 선물이에요. 저는 한국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어리둥절하면서 고맙다고 하는 그 사람의 얼굴도 제대로 못 쳐다보고 도망치듯이 서점을 나왔다. 지금도 도저히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몇 년간 짝사랑하던 사람에게 고백을 해도 그렇게 바보 같지는 않았을 것 같다. 어쨌든 실물은 책에 있었던 사진보다 훨씬 예뻤던, 글도 예쁜 우다 토모코의 사인을 이렇게 가질 수 있었다. 다음부턴 절대 이런 미션을 스스로에게 내리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있어야할 책은 다 있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서점 울랄라.
외모와 글처럼 정갈한 우다 토모코의 사인.


여담으로 말하자면, 다음날 오키나와 북부 나카진의 게스트하우스에서 나와 똑같은 책을 가진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며칠 뒤 나하에 갈 거라면서 이 서점에 들러 저자의 사인을 받을 생각이라며 들떠서 말했다. 나는 이미 사인된 내 책을 보여주었다. 그는 금세 풀 죽은 얼굴이 되었다. 자기만 한 아주 특별한 생각일 줄 알았는데, 이미 내가 해버려서 김이 빠져버렸단다. 실망시켜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먼저 나하에서 사인을 받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반대 상황이었다면 나는 풀 죽은 정도가 아니라, 여행의 의욕을 잃어버렸을 것 같다. 그리고 우리 둘 뿐만 아니라 우리 앞과 뒤에도 이 책을 들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사인을 받는 사람이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사람 생각은 역시 거기서 거기야. 다만 우다 씨가 유명세로 너무 피곤해지지 않길 바랄 뿐이다.


사인을 받고 나니 비가 많이 내렸다. 나는 자전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비를 맞고 돌아다녔으며, 나하를 비로 마감했다. 다음 날은 오키나와 북부로 떠나는 날이다.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면 아침 일찍 떠나야 했으나, 여행 며칠 만에 대화다운 대화를 하며, 술을 알딸딸하게 마시고는 아침을 기약하지 않고 잠에 빠져들었다. 아침이 걱정되긴 했지만 그럼 뭐 어때. 내일은 내일의 차가 있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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