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사는 렛잇고를 부르며, 자신의 힘을 더 이상 부정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당신들이 바라는 곳에 어색한 모습으로 서 있기보다는, 타고난 내 모습 그대로 살겠다고 세상을 향해 외친다. 그것은 자신을 속박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나겠노라는 힘찬 독립 선언이었지만, 그걸 보면서도 나는 왠지 상쾌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 노래는 성문을 쾅 하고 닫는 장면으로 끝이 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나에게는 엘사의 렛잇고가 어딘가 부족한 성장담으로 느껴졌다. '말 잘 듣는 착한 아이가 되지 않겠다는 선언은 유의미했을지 몰라도, 결국에는 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유폐한 것에 지나지 않잖아?' 이런 의문이 항상 마음 속에 있었다. 아무래도 난 유폐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헤르만 헤세는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고 했다. 쓰여진 지 100년도 넘은 이 문장에서 내가 주로 읽어낸 것은 '태어나려는 자의 욕망'이었다. 즉, 욕망이 먼저 있고, 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꼭 거쳐야 하는 통과 의례가 '세계의 파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어쩌면 저 문장은, 태어나려는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세계를 깨뜨린 이후에야 비로소 욕망이 생겨날 수 있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아기 새들은 자신이 독수리인지 비둘기인지 알지 못한 채 알을 깨고 나온다. 그러니까 무엇이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알을 깨고 나옴으로써 그제서야 비로소 '무엇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품어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세상 뿌듯한 표정으로 노래를 마친 엘사를 보며 나는 다급하게 '아니, 그래서 뭘 어떻게 할 건데? 평생 여기에서 혼자 살 거야?' 라고 물었지만, 엘사는 나와의 대화를 거부하며 문을 쾅 닫고 성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엘사는 내가 납득할 수 있는 그럴 듯한 답을 주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엘사의 선언이 다소 미숙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좀 다르다. 무엇이 될지 마음의 준비를 마친 다음에, 그러니까 모든 준비가 완료된 다음에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세상이 나를 기다리는지, 그리고 내 자아는 어떤 모습인지 그 어떤 것도 알지 못한 채 일단은 알을 깨고 나오는 것, 그렇게 알을 깨고 나온 이후에 세상과 교감하며 내가 누구인지 알아가는 것. 뭐, 그런 게 성장 아닐까?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절연과 유폐와 고독은 그 전후 맥락과 무관하게 그 자체가 곧 성장이라 할 수 있겠다. 납득과 설득을 포기한 타인들이 물러난 그 폐허에서 우리는 그제서야 우리 자신의 모습을 천천히 들여다볼 수 있으니까.
나 같은 사람이 자신의 행동에 납득하지 못할 걸 알면서도 엘사는 성 안에 스스로를 감금시켰다. 다른 사람의 따뜻한 이해 같은 건 바라지도 않는다는 듯 '추위 따윌 두려워 해 본 적은 없어'라고 말하며 휙 돌아서 문을 쾅 닫고 성 안으로 쏙 들어가버린다. 아- 참으로 멋진 고독의 순간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