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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둥글레 Nov 02. 2019

욕망을 삼키는 습관

넷플릭스 <언브레이커블 키미슈미트>


키미는 미친 교주에게 납치되어서 무려 15년이나 지하 벙커에 갇혀 지낸 인물이죠. 나이 서른이 되어 지상에 발을 내딛은 키미는 과거의 비극을 덮어두고 새 출발을 하려고 합니다. 키미는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고 싶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안쓰럽게 바라보는 게 싫어서 억지로 더 기운을 내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15년의 비극이 그렇게 쉽게 사라질 리는 없겠죠. 비극은 키미의 몸 이 곳 저 곳에 흔적을 남깁니다. 교주처럼 콧수염이 난 남자를 보면 몸이 얼어붙구요. 예고도 없이 누군가 키미를 건드리면 반사적으로 상대를 제압해버리고 맙니다. 무언가를 억지로 참으면 지독한 냄새의 트림이 터져 나오기도 하고, 심지어는 잠결에 룸메이트의 목을 조르는 위험한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치료가 필요한 상처를 억지로 덮어두면 곪아 버리죠. 몸에서 터져 나오는 그러한 증상은 어쩌면 마음이 내지르는 비명일 지도 모릅니다. 룸메이트인 타이투스는 키미에게 뭔가 억누르는 게 있다면 누군가에게 꼭 털어놓아야 한다고 충고합니다. 그건 몹시 위험한 일이라고 경고하면서요. 하지만 키미는 자신의 문제를 인정하려 하지 않죠. 


그러던 어느 날, 키미는 안드레아를 만나게 됩니다. 카운셀러인 안드레아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도 단번에 키미의 문제점을 짚어냅니다. 

항상 그렇게 자기보다는 남들을 먼저 챙기나요?
 

키미는 자기 모습을 찬찬히 돌이켜봅니다. 친구들의 스트레스를 풀어주기 위해 스스로 교주 역할을 하며 인간 샌드백이 되었던 당시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당장 오늘 아침만 해도 타이투스가 욕실을 비워주지 않아서 화장실 변기용 물티슈로 대충 몸을 씻고 나와야만 했죠. 남들을 먼저 챙기는 편인 것 같다고 대답하는 키미에게 안드레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행복한 사람은 남들만큼이나 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여겨요.

키미는 안드레아의 조언에 따라 타이투스와의 대화를 시도하지만 결국 싸움으로 끝이 납니다. 대화가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못했다고 불평하는 키미에게 안드레아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갈등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죠. 하지만 다퉈야 해결되는 거예요.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이 키미의 성격이죠. 하지만 키미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쉽게 자신의 욕망을 포기해왔습니다. 항상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거죠. 관계에서의 다툼은 서로 다른 욕망의 부딪침입니다. 갈등과 충돌이 싫었던 키미는 자신의 욕망을 쉽게 포기해왔죠. 그러니까 애초에 다툴 일도 없었던 거고요. 


안드레아는 키미의 문제를 계속해서 지적하지만 키미는 자기 문제는 자기 혼자 해결할 수 있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하지만 키미 마음 속에서 이미 터져버린 화산은 그런 얄팍한 웃음으로는 통제되지 않죠.  키미는 결국 안드레아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여기, 딸기와 바나나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하나씩 나눠 먹어야 하는 상황이라고 가정해보죠. 이 때, "나는 딸기가 먹고 싶어." 라고 분명하게 자신의 욕망을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딸기가 먹고 싶으면서도 "나는 아무거나 괜찮아."라고 말하며 자신의 욕망을 감추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욕망을 감추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항상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도 문제가 있으니까요. 내가 처한 상황, 내 욕망의 크기, 상대와 나의 관계, 상대의 감정.. 우리는 이런 다양한 것들을 고려해서 자신의 욕망을 다룰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성숙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겠죠. 


자신의 욕망에 지나치게 충실한 사람들은 주변으로부터 부정적인 피드백을 많이 받게 됩니다. "어떻게 다 네 마음대로만 하려고 하니?" "주변 사람들 기분 좀 생각해서 행동해." "넌 항상 너무 이기적이야." 그들은 주변의 그런 반응을 접하며 자신의 행동을 조금씩 교정해나갑니다. 그러면서 균형을 찾게 되죠. 


하지만 문제는 자기 욕망을 습관적으로 감추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과 웬만해서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배려심이 깊다, 교우관계가 원만하다, 등의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로 받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욕망을 감추는 것에 점점 더 특화되어 가죠. 올바르게 표현하는 연습을 해야 할 시간에 감쪽같이 숨기는 연습만 하게 되는 셈입니다. 


욕망을 적절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건 욕망을 적절하게 억누르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크기의 문제입니다. 억누르지 못한 욕망이 바깥으로 터지는 화산이라면, 표현하지 못한 욕망은 안에서 터지는 화산입니다. 주변에서는 문제 자체를 알아 차리기 대단히 어렵구요. 마음 속이 타들어가는 고통은 오롯이 혼자서 견뎌내야 합니다. 


내가 나의 욕망을 포기하면 나는 유령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나의 욕망을 표현해 줄 사람은 오직 나밖에 없으니까요. 




습관적으로 욕망을 감추는 키미의 모습이 저에게 특히 더 각별하게 느껴졌던 건, 저에게도 그런 습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사람들과의 갈등을 무척 두려워하는 편이라서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라는 태도로 상대방을 대하는 습관이 있거든요. 이런 태도는 한 번 보고 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특별히 문제되지 않지만, 가족이나 친구처럼 오래 함께 하는 관계에서는 확실히 문제가 되는 것 같습니다.


나 때문에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다, 상대를 배려하고 싶다, .. 처음에는 분명 이런 좋은 마음에서 비롯된 습관이었을 텐데.. 이게 너무 오래 굳어지다보니 제가 바라는 게 있어도 이야기를 잘 못하겠더라구요. 특히 제가 원하는 게 상대가 원하는 것과 명백하게 충돌이 된다면 더더욱 그렇구요. 그래서 조금씩 마음을 표현하는 연습을 하려고는 하는데 그게 참 쉽지만은 않습니다. 습관이라는 게 참 무서운 것 같아요.


물론 처음부터 잘 할 수는 없겠죠. 서툰 표현 떄문에 상대의 마음에 상처를 주거나, 실제 내 마음과 다른 말을 뱉어놓고 후회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모든 실패와 상처가 곧 배움의 흔적인 거겠죠. 그렇게 믿고 앞으로도 꾸준히 연습해나가고 싶습니다. 


적어도 이제는 저에게 욕망을 삼키는 습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표현하는 연습을 해야겠다는 결심도 하게 되었으니, ... 영문도 모른 채 무작정 삼키기만 하던 예전보다는 훨씬 더 좋은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침내 카운셀러를 찾아가기로 결심한 키미처럼요. 안드레아와 키미가 어떤 식으로 상담을 이어 나갈지는 다음 기회에 조금 더 다뤄보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tqpFCvCP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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