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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둥글레 Apr 04. 2020

마음의 준비

놀이터에서 흙장난을 하다가 '허수아비 할 사람 여기 붙어라~' 하는 노랫소리가 들리면 쏜살같이 달려가 친구의 엄지를 쥐었다. 부랴부랴 엄지를 쥐고 얼굴을 봤더니 생전 처음 보는 아이일 때도 있었지만 일곱살의 세계에서 그런 것쯤은 '어제는 그렇게 비가 오더니 오늘은 날씨가 좋네.' 정도의 일이었다. 신기하긴 하지만 대단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딱히 허수아비 할 기분이 아닌 날에는 그냥 흙장난을 계속 했다. 하늘이 바짝 마른 날엔 물을 담아와 흙을 축축히 적신 다음 먹을 수도 없는 경단을 열심히 만들었고, 큰 비가 지나간 뒤 놀이터 여기 저기에 웅덩이가 생긴 날엔 물길을 내서 그 웅덩이를 하나로 이어보는 놀이도 했다. 어떤 놀이를 하든 무척 자연스러운 일이었기에 따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순간은 없었다. 

열일곱살은 어땠지? 학교에 가서 온종일 공부하는 게 유일한 일과였는데 나는 그게 딱히 싫지 않았다. 아니, 싫기는커녕 구원처럼 느껴질 때가 더 많았다. 그 때의 우리 집은 깊은 바다 속으로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기 때문에 밤에 자려고 누우면 짜고 따가운 물이 내 얼굴을 뒤덮기 일쑤였다. 당장이라도 집을 건져 올려 힘껏 비틀어 짠 뒤 양지바른 곳에 널어 보송보송하게 말리고 싶었지만 월세 주고 사는 집을 내 마음대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정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 속에서 허덕이는 것에 비하면 문제집을 푸는 건 오히려 즐거운 일이다. 문제집은 문제로 가득 차 있는 문제적 책이지만 그래도 거기 있는 모든 문제는 각각의 정답을 항상 가지고 있으니까. 문제집을 푸는 행위는 찾아내주기를 바라며 오답 속에 조용히 숨어 있는 정답을 찾아내는 일이었기에 나는 별다른 고민 없이 그것에 매진할 수 있었다. '반드시 정답이 있다'라는 전제 위에 축조된 세상에는 딱히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상처난 짐승이 어두운 동굴을 찾듯 습관처럼 '마음의 준비'를 읊조리게 된 건 스물일곱살 무렵부터다. 이 세상이 내 마음 같지 않은 것은 물론, 나조차도 내 마음 같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 즈음이었고, 이 세상에는 정답이 없는 문제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니 우리가 인생을 살며 맞닥뜨리게 되는 대부분의 문제가 그러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도 그 즈음이었다. 제 몫의 정답을 애초에 가지고 있지 않은 문제들을 마주할 때 정말 필요한 것은 오답 속에서 정답을 찾아내는 기술이 아니라 선택하고 선언하는 용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생각은 자연스레 '그러면 그 용기는 대체 어디에서 얻을 수 있을까?'하는 질문으로 연결되었다. 

서른이 넘어 만난 아리스토텔레스는 내게 이런 말을 해 준다. '용감해서 용기 있는 행동을 하는 게 아니야. 용기 있는 행동을 하다보면 조금씩 용감해지는 거지.' 무척이나 용기를 주는 말이긴 하지만 이 말에 동의한다고 해서 바로 내가 용기있는 행동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생각한 대로 살아진다면 좋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니까. 생각처럼 살지 못하는 시기가 너무 길었던 걸까? 이제는 몸을 의탁할 수 있는 근사한 생각들을 만나도 반갑기보다는 두렵다. 내 것으로 소화하지 못한 근사한 생각들이 스스로를 매질하는 채찍으로 쓰이는 걸 너무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라 말할 때의 내 마음은 대충 이렇게 풀어쓸 수 있다. : 내가 바라는 게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지만 그것의 영향범위를 아직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다,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고 영향범위도 파악했지만 부정적인 영향까지 감내할 자신이 없다, ... 이렇게 쓰고 나니 '마음의 준비'라는 것이 결정을 유예하는 과정에 사용되는 표현이라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알겠다. 

이런 생각을 하고 난 다음에는 으레 '그래, 그럼 앞으로 마음의 준비라는 걸 되도록 하지 말자. 일단은 어느 쪽이든 결정해버리자.'라고 결심하고야 마는 것이 나의 사고 패턴인데, 이것 역시 스스로를 매질하기 위한 채찍을 감아쥐는 과정이다. 어쩌면 나에게 필요한 건 그저 내가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걸 그냥 인정하는 것 아닐까. 불안과 열심히 싸우는 내 모습을 불만스레 바라보면서 '이거봐, 결정을 또 그냥 미루고 있잖아.'라고 투덜대기보다는, 그냥 나의 고군분투가 자책 없이 무사히 끝나길 바라는 한편, 어떻게든 나름의 결정을 내릴 것이라는 믿음을 안고 기다려 주고 싶다. 

내 마음 속에는 굽어 있는 뿔을 바로 잡으려다 내 손에 죽어나간 소의 사체가 한가득 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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