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둥글레 Dec 15. 2019

고구마 자리

절벽에 매달려 보내는 밤


고독의 ㄱ자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기분을, 당신은 알까. 정신을 차리고 보면 발 밑이 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절벽에 매달려 있다. 온힘을 다해 매달려 있지만, 앞으로 얼마나 더 매달려 있을지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든다. 그냥 전부 놔버리고 싶지만, 내가 매달린 ㄱ의 절벽이 '고'일지 '독'일지 알 수 없어서, ... 그러니까 내 발밑에 ㅗ의 발판이 놓여 있는지, 아니면 그저 까마득한 허공일 뿐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섣불리 행동할 수 없다.


내가 모르는 게 그뿐만은 아니다. 나는 ㅗ의 발판에 놓인 것이 푹신한 쿠션인지, 날카로운 칼날인지 모른다. '독'에서 떨어져 나오면 영영 끝일 지도 모르지만, 그저 '독'에서 멀어지는 해독의 경험을 할 수 있을 지도 모르지. 좋을 수도 있지만 나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만, 결국에 남는 건 나쁜 것에 대한 상상뿐이다. 내가 손을 놓으면 칼날에 몸이 찢기고 말 거야, 내가 손을 놓으면 영영 끝이야. ... 푹신한 쿠션과 해독의 경험에 대한 상상은 일찌감치 절벽 아래로 떨어져버렸다. 아무래도 고독의 절벽을 이루고 있는 바위는 강력한 자성을 띄고 있는 것 같아. 긍정적인 건 전부 멀리 밀어내고, 부정적인 건 어떻게 해도 떨쳐지지 않거든.


힘들지만 버텨내는 것, 힘들지만 이 절벽을 붙잡고 있는 것,.. 그게 나에게 남은 유일한 긍정이다. 절벽에 매달려 있을 때의 기분은 그렇다. 모서리를 부여잡고 중력과 싸우며 버티다 보면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ㄱ을 ㄴ으로 만들어준다. 그러면 힘들게 매달려 있던 절벽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탄탄한 등받이를 가진 소파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손끝에 멍이 들 정도로 ㄱ의 모서리를 부여잡고 있던 나는 그제서야 온몸에 긴장을 풀고 소파에 몸을 묻는다. 그러다가 또 절벽이 찾아 오기도 하고, 그러다가 바람이 불어 절벽이 소파로 바뀌기도 하고, ... 그것의 반복.


그래서 나는 어떤 조건에서 바람이 시작되는지 관찰했다. 바람은 아주 찰나에 시작되는 것이라서 매우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 나는 바람이 시작된 모든 순간을 수집했다. 커다란 석양을 보고 우주가 참 크다는 걸 새삼 깨달았을 때, 리암 갤러거의 misunderstood를 들을 때,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 라일리가 슬픔을 표현하는 장면을 볼 때, 내 것과 꼭 같은 다른 사람의 마음과 마주칠 때, ... 영문도 모른 채 다시 절벽에 매달리면, 나는 내가 수집한 순간을 하나 둘 꺼내 쓴다. 주문을 외우듯 하나 둘 곱씹다 보면,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절벽을 소파로 바꿔줄 때가 있거든.


하지만 그 시도가 늘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수집한 모든 순간을 처음부터 끝까지 곱씹었는데도, 바람이 불어오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땐 달리 방도가 없다. 그냥 절벽에 매달려 있을 수밖에. 절벽에 매달려 있는 동안은 거의 대부분 고독에 대해 생각한다. 고독의 모양과, 고독의 정도와, 고독의 상처에 대해. 하루는 내가 매달린 절벽의 모양을, 그러니까 고독의 ㄱ을 곱씹어보기도 했다. 어쩜 이렇게 각이 졌을까, 이 모서리에 상처 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자기 안에 절벽을 두 개나 품고 있는 '고독'은 어떤 기분일까.


스산한 밤중에는 이런 대화가 들려오기도 한다. "겉으로 보기엔 똑같을지 몰라도 우린 너무 달라요. 나는 여는 소리지만 당신은 닫는 소리잖아요. 입술을 들어올리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당신은 상상도 못할 거예요." 고의 ㄱ은 왠지 화가 난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독의 ㄱ도 지지 않고 말했다. "당신에게는 당신을 지탱해주는 ㅗ가 있잖아요. 난 그런 게 없어요. 나는 내가 지탱해야 하는 것들뿐이에요. '도'의 무게를 감당하는 게 얼마나 벅찬 일인데요." 평행선을 달리는 고독의 고독한 대화를 들으며 나는 더 고독해진다.


한차례 말싸움을 주고 받은 두 절벽은 입을 꾹 닫는다. 달도 뜨지 않아 어두운 밤은 너무도 조용하다. 구름이 흘러가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쌕쌕대는 짐승의 숨소리로 가득찬 고요한 밤공기를 가르며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온다. "꾹 닫힌 입술을 들어올리는 거, 정말 힘들 것 같아요. 몰라줘서 미안해요." 입을 먼저 뗀 건 독의 ㄱ였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고의 ㄱ이 이야기를 시작한다. "정말 힘든 건.. 내 뒤에 오는 단어들이 대부분 괴로워한다는 거예요. 고독, 고생, 고난, 고통, 고장, 고민, ... 내가 괜한 짓을 한 건가 하는 생각이 너무 많이 들어요. 괴로움의 상자를 열어버린 것 같다는 죄책감을 견디는 게 힘들어요."


고의 ㄱ이 하는 이야기를 말없이 듣던 독의 ㄱ은 이렇게 말한다. "천만에요. 괴롭지 않은 단어들도 있어요. 고래, 고등어, 고양이, ... 다 제가 너무 좋아하는 단어들인데요? 당신은 고래도, 고등어도, 고양이도 될 수 있어요. ... 아! 고구마도 있다. 고구마도요." 고의 ㄱ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며 말한. "와, 고구마가 나올 줄은 생각도 못했네." 그 헛웃음이 독의 ㄱ을 웃게한다. 독의 ㄱ도 덩달아 웃음을 머금고 말한다. "왜요. 고구마. 얼마나 맛있어요. 달달하고 좋잖아요."


우리는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을 이어 고래 자리와 고등어 자리, 그리고 고양이 자리를 만들었다. 고구마 자리를 만들 땐 군침을 꼴깍 삼키기도 했다. 고구마와 궁합이 잘 맞는 음식 얘기를 하며 열을 올렸고, 고구마에 얽힌 추억에 대한 이야기도 한참 나눴다. 내 인생에서 고구마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많이 한 밤이었다. 그러는 동안 어딘가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따뜻한 고구마 냄새를 가득 머금고 있는 바람이었다. 맛있는 바람은 절벽을 부드럽게 눕혀 소파로 만들어 주었다. 나는 그 소파에 걸터앉아 바람이 시작된 모든 순간을 기록하고 있는 노트를 펼쳐 들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적었다. [고구마 자리].




머지 않은 미래에 고독의 절벽에 매달리게 될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남겨두고 싶다.

도무지 바람이 불어올 것 같지 않은 순간에도 바람은 불어온다.

절벽이 없는 인생은 없지만, 절벽으로만 가득 찬 인생도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떻게든 되겠지'의 미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