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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둥글레 Apr 21. 2020

아이는 왜 사람들의 뒷모습을 찍기 시작한 걸까?

영화 <하나 그리고 둘> 을 보고 


내가 보는 걸 아빠는 못 보고, 아빠가 보는 걸 나는 못 봐요. 
어떻게 하면 아빠가 보는 걸 내가 볼 수 있나요? 


조숙한 꼬마 양양은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 NJ는 이렇게 답했다.


그래서 우리에게 카메라가 필요한 거란다. 


양양은 말했다. 


우리는 절반의 진실밖에 볼 수 없는 건가요? 





아빠에게 카메라를 건네 받은 양양은 그 날 이후로 열심히 사진을 찍는다. 그 중에서도 사람들의 뒷모습을 특히 공들여 찍는다. 제 아무리 뛰어나고 대단한 사람이라 할 지라도 자기 뒷모습은 볼 수 없는 법.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다는 듯 자신만만하게 눈을 굴리며 살아가지만,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스스로의 뒷모습조차 살필 수 없는 반쪽짜리 존재다. 그런 의미에서 '뒷모습'은 오직 절반의 진실로만 살아가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그래서 양양은 사람들의 뒷모습 사진을 찍는다. 

그렇게 양양은 사진 속 주인공이 놓치고 있는 절반의 진실을 기록한다.


양양은 자신이 찍은 사진을 사진 속 주인공에게 건넨다. "삼촌은 삼촌 뒷모습을 못 보잖아요. 그래서 내가 도와주려구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사진을 건네고 휙 돌아서는 양양의 모습에서 에드워드 양 감독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사람들이 보지 못한 절반의 진실을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그렇게 그들을 채워주고 싶어서, 양양은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 영화 <하나 그리고 둘> 역시 내가 보지 못한 나의 뒷모습 같은 영화다. 에드워드 양 감독은 사람들이 보지 못한 절반의 진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그렇게 우리를 채워주고 싶어서, 이 영화를 찍은 걸지도 모른다. 




영화 <하나 그리고 둘>에는 꼬마 양양 외에도 다양한 가족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아빠 NJ는 사업차 만난 일본인 기업가 오타에게서 친근함을 느낀다. 그들은 가족에게도 하지 못할, 가족이라 하지 못할 이야기들을 서로에게 털어 놓는다. 그러는 동안 NJ는 자신에게 아직 미련을 갖고 있는 첫사랑 쉐리와 재회하게 된다. 다시 시작하자는 쉐리의 이야기에 NJ는 과연 어떤 대답을 하게 될까.



엄마 민민은 직장일을 하며, 혼수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어머니의 병간호도 도맡아 하고 있다. 의사 선생님은 매일 말을 걸어서 의식을 자극해주라고 말했다. 하지만 민민에게는 누워 있는 엄마에게 말을 거는 게 너무 힘겨운 일이다. 엄마가 안 일어나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 때문에 힘든 것은 아니다. 민민을 힘들게 하는 건 불과 몇 분으로 요약되는 자기 인생의 초라함이다. 매일 매일 엄마에게 이야기를 하는데, 매일 매일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자기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진 것이다. 민민은 자신의 초라함을 극복할 수 있을까. 


딸 팅팅은 친구 리리의 남자친구 패티에게 호감을 갖게 된다. 하지만 몇 번의 데이트를 한 뒤, 패티는 다시 리리에게 돌아간다. 패티는 팅팅을 피하려 하지만 팅팅은 오히려 패티에게 다가가서 말한다. "나 때문이라면 불편해하지 않아도 돼. 난 괜찮아." 팅팅은 자기 나름의 친절을 베푼 거였지만, 패티는 무섭게 화를 낸다. 팅팅은 자신이 왜 그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3시간 남짓한 긴 러닝타임의 대부분은 그들 각각의 인생 이야기로 채워진다. [가족]으로 묶여 있긴 하지만, [가족]이라는 중력장 내에서는 관측되지 않고, 해석될 수 없는 이야기들. 그래서 이 영화가 보여주는 우리에게 보여주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절반의 진실이라 할 수 있다. 




영화 <하나 그리고 둘>의 원제는 一一 (yi yi)이며, 부제는 a one and a two다. 처음 타이틀이 소개되는 장면을 보면, 왜 저런 원제에 왜 저런 부제가 붙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검은 화면 중앙에 하얀색 선이 그어지며 '하나'를 뜻하는 글자 一가 하나 생겨난다. 그리고 잠시 후 그 아래 쪽에 '하나'를 뜻하는 글자 一가 하나 더 생겨난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一가 두 개 쓰여진 거라 볼 수도 있고, 二가 하나 쓰여졌다 볼 수도 있다. 서로 다른 존재가 모여 하나의 가족이 되듯, 하나의 가족으로 묶여 있지만 결국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야 하듯. 


一이라는 글자는 곧게 나아간다. 그 아래 쓰여진 一 역시 곧게 나아간다. 평행하기 때문에 그들은 결코 포개질 수 없다. 하지만, 서로의 뒷모습을 대신 봐주겠다는 마음이 있다면,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기꺼이 지켜봐주겠다는 마음이 있다면, 서로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서로의 이야기에 귀기울여주겠다는 마음이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고독함을 넘어 하나의 글자가 될 수 있다.




양양은 이제 막 태어난 어린 사촌을 보며, 할머니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 "아, 나도 이제 늙었구나."에 담긴 마음을 비로소 이해한다. 제 머리도 못 가누고 꼬물대는 사촌을 보면 "아, 나도 이제 늙었구나."하는 말이 절로 나오기 때문이다. 양양은 할머니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에서 자신의 깨달음을 전한다. 여러 개의 글자가 한데 모여 하나의 글자로 거듭나는 순간에 대한 기록. 




극중에서 패티는 이런 말을 한다. "우리 삼촌이 그러는데, 영화가 발명된 후로 인간의 수명이 3배는 늘었대." 영화가 제공하는 간접 체험 덕분에 본래 우리에게 허락된 것보다 많은 경험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 영화는 나의 수명 연장에 아주 확실히 기여했다고 말할 수 있다. 


선명한 주제의식이나 알기 쉬운 대결 구도 없이 3시간을 끌어 가는 영화이기 때문에 다소 지루할 수도 있고, 집중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내가 그랬다. 하지만 이 영화 곳곳에 스며 들어 있는 여백과 불확실함에 몸을 기꺼이 던질 수만 있다면, 이 영화는 무척 색다른 체험이 될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xy0_mhZxL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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