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형의 삶
무정형의 삶 / 김민철 지음
나는 로망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내가 노력하고 있는 것에 대한 결실을 보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그건 꿈이고 로망이라고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어쩐지 로망이라면 실용적이지 않은 느낌이 있었다. 뭔가 이룬다고 돈을 벌거나 명예를 가지는 건 아니지만 만족감을 주는 이상에 이름을 붙인다면 로망이라고 생각했다.
친구는 전원주택에 살고 싶어 했다. 체력이 좋고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은 친구는 시간이 날 때마다 근교의 주택이나 택지를 보러 다녔다. 마침내 친구는 살고 있던 아파트를 팔고 대출을 더 얻어 같은 스타일로 여러 채를 지어 놓은 전원주택 단지의 집을 샀다. 집의 모양은 비슷하지만 정원은 집집이 개성 있게 꾸며놓은 단지였다. 나는 그때 비교 지옥에 빠진 친구를 보고 로망을 이루는 것의 위험성을 알았다.
쉽게 이룰 수 있으면 로망이 아니다. 로망은 실현하고 싶은 소망이나 이상이니 로망을 이룰 때는 큰 결단을 해야 하고 경제적인 무리도 따르기 마련이다. 친구는 가진 돈을 모두 써서 이사했기 때문에 집을 꾸미는데 쓸 경제적 여력이 없었다. 그런데 앞집 뒷집에서는 로망을 이룬 게 아니라 그냥 이사한 사람들이 보이는 곳과 보이지 않는 곳에 많은 돈을 들였다. 그걸 봐야 하는 친구는 자기는 그렇게 할 수 없음에 좌절했다. 돈 대신 몸을 갈아 넣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쉽게 이룰 수 있으면 로망이 아니니 로망을 이룬 사람들은 로망 나라의 꼴찌가 될 수밖에 없었다.
로망을 이루면 기쁨보다 먼저 못된 감정들이 새치기하고 들어와서 거들먹거린다. 그걸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이후의 삶이 달라진다. 친구는 안목과 발품, 체력으로 비교 지옥을 극복하고 전원생활을 즐기고 있지만 그 과정이 쉽지 않았다. 그리고 여기 로망을 이룬 또 한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20년간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로망을 이루기 위해 파리로 떠난 사십 대 여자의 이야기다. 그녀는 ‘우선은 떠나보자, 나의 오래된 꿈속으로’라고 외쳤다. 김민철이 쓴 ‘무정형의 삶’ 은 그렇게 시작했다.
한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해외여행을 가본 중 가장 실망한 도시를 꼽으라고 했더니 제일 많이 거론된 곳 중 하나가 파리였다. 개똥밭에 지린내가 진동했고 멋진 건물은 한두 개뿐 과대 포장된 도시라고 악평을 쏟아 냈다. 올림픽 이후 나아지기는 했지만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누군가에게는 이렇게 실망의 도시였던 파리가 김민철에게는 이루지 못한 절절한 사랑이었다.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사랑의 이유를 묻는 건 어리석다며 아무리 촘촘히 대답해도 말과 말이 만드는 성근 망 사이로 사랑은 빠져나갈 수밖에 없으니 그녀의 사랑을 남들에게 이해시키는 것은 어렵다고 했다. 그럼에도 김민철은 334페이지짜리 로맨스를 써냈다. 파리와의 사랑 이야기였다.
20년 다닌 직장을 그만두면서 파리행을 선언하자 김민철의 직장 동료들은 드디어 그녀가 로망을 실현한다며 눈물을 보였다. 그 눈물이 어떤 의미인지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단지 동료들은 김민철이 파리에서 묵을 숙소에 대해 단호한 의지를 보였다. 김민철은 떠나는 너뿐만 아니라 남아있는 우리의 로망을 실현하러 가는 거다. 그렇다면 우리의 로망에 걸맞은 집에서 살아줘야 한다. 파리에 가서 시시한 집에서 시시하게 있으면 그건 로망이 아니다. 그녀는 동료들의 성화에 못 이기는 척 부엌과 거실, 침실이 분리되고 거실에 소파와 테이블이 있는, 창문도 여러 개가 있는 집에 도착했다. 그렇게 두 달간의 파리에서 살기가 시작되었다.
김민철이 파리에서 하고 싶은 일 리스트는 ‘한꺼번에 여러 개의 치즈 사기, 루콜라 큰 봉지로 사기, 궁금한 식재로 다 사보기, 샴푸와 린스 사기, 꽃 사기, 아침에 마실 차 사기, 어제 먹다 남은 와인 마시기, 각종 공연 보기, 매일 다른 미술관 가기’ 였다. 이 리스트가 말하는 것은 그러니까 파리가 여행이 아니라 살기 위한 장소였다는 것이다. 비록 두 달 이지만 김민철은 파리에서 여러 개의 치즈와 루꼴라를 큰 봉지로 사도 다 먹을 수 있고 내일도 마실 수 있으니 와인을 남겨도 되며 꽃을 사도 두고두고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여행이 아니라 파리에서 ‘살’거니까 말이다.
로망을 이룬 사람들이 겪는 로망나라 꼴찌 증상을 김민철이라고 피해갈 수 없었다. 그녀는 버킷 리스트를 하나하나 이루면서 그 자리로 슬금슬금 밀고 들어오는 허무감에 당황한다. 김민철은 허무를 만났을 때 첫 문단에서 '이상한 일이었다. 아니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문단 시작을 '올 것이 왔다. 예상은 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한입 가지고 두 말이 아니라 한 장에서 두 말이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로망을 이룬 사람은 마음속에 두려움을 감추고 그저 좋기만 할 거라고 섣부르게 낙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야 로망인데 이 십년이나 다닌 직장을 그만두고 나선 길인데 그게 허무하면 안 되는 일 아닌가.
김민철은 허무에 잠식되기 전에 재빠르게 행동을 취한다. 파리를 잘 아는 누군가에게 제대로 파리를 사랑하는 방법을 전수(傳受)하기로 한다. 그렇게 만난 ‘장인의 아틀리에’를 쓴 이지은 작가와 ‘지은 집밥’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프랑스의 식생활을 밀도 있게 들여다본다. 그리고 파리에서 그림을 그리는 유나 작가의 한 달짜리 오일 파스텔 수업을 듣는다. 그 사이 성향이 다른 두 친구가 파리로 들이닥쳐 그녀와 같이 시간을 보내며 김민철의 파리가 다양한 빛깔로 채워진다.
‘무정형의 삶’을 보면서 나는 내내 어떤 대상을 이토록 투명하게 좋아할 수 있는 게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생각했다. 김민철은 파리를 로망 했고 기어코 이루었으며 매력적이고, 웃기고, 다정하고, 감동을 줬다가, 또 울렸다가, 새침했다가 또 자기 방식대로 친절했던 파리를 기꺼이 사랑했다. 이토록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좋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평생 내가 무언가를 좋아하는 걸 드러내는 게 부끄러웠다. 환갑이 다 되어서 손녀를 만나고 나서야 내 사랑에 주저함을 날려버렸다. 세상에는 나와 같은 사람이 제법 있어서 김민철이 책 말미에 썼다.
부디 이 마음이 당신에게도 전염되길.
그리하여 멀지 않은 어느 날
부디 당신도 당신의 그곳에 도착할 수 있기를.
로망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나도 가끔은 실눈을 뜨고 몽상에 젖는다. 나의 로망은 김민철처럼 머나먼 유럽에 있지 않다. 그저 바닷가 어떤 마을의 소박한 집에서 아침 일찍 일어나 산책을 하고 가벼운 아침을 먹으며 오전에는 글을 쓰고 오후에는 차를 몰고 나가 주변을 살피고 싶다. 그 고장에 있는 도서관과 미술관에 가서 별생각 없이 오래도록 앉아있고 싶다. 혼자지만 혼자가 아닌 시간을 보내도록 친구나 가족들이 놀러 왔으면 좋겠다. 그럼 점심은 내가 발굴한 맛집에 다녀오고 저녁은 맛집 다녀오는 길에 들른 시장에서 먹거리를 사다 대접하고 싶다. 파리도 아니고 강릉쯤이면 되는 일인데 어쩌면 그것도 어려울지 모르겠다. 이렇게 말은 하면서도 나는 김민철에게 전염돼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파도 소리와 반짝이는 모래밭을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