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장 단지를 보며

by 은예진

나는 일남 삼녀 집안의 맏이다. 아들을 낳으려고 딸을 셋 낳은 부모님이지만 특별히 아들을 더 귀히 여기신 것은 없었다. 이런 집 장녀들은 K장녀 콤플렉스에 시달리거나 이기적이거나 둘 중 하나인데 나는 몹시 이기적으로 나 밖에 모르는 장녀이다. 어릴 적부터 자주 아파서 방에 혼자 누워 있으면 밖에서 엄마가 너무 깔깔거리고 웃어서 나만 빼고 즐거운 가족들을 원망하고는 했다. 학교를 가지 못하고 마루 끝에 앉아 있으면 햇살이 유난히 반짝거리던 기억이 있다. 열이 나서 기운이 없는 아이는 동생들이 학교 가고 아무도 없는 텅 빈 마당을 몽롱한 눈빛으로 바라보고는 했다. 그렇다고 엄청 큰 병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개근상 타지 못할 만큼 감기니 독감에 자주 걸리는 어린이였다.


언젠가 친정집 거실에 누워 있는데 셋째의 아들이 소파에서 나를 향해 뛰어내렸다. 놀란 엄마가 조카를 말리며 '이모는 너네 엄마랑 달라. 그렇게 막 밟으면 안돼!'라고 말리셨다. 엄마한테 나는 어렸을 때나 나이 들었을 때나 그런 존재였다. 건강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지도 못했으며 반대하는 결혼까지 해서 신경 쓰이게 하는 아픈 손가락이었다. 엄마가 비교적 이른 70대에 치매에 걸리면서 나를 걱정하지 못하자 그 몫을 동생들이 맡아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니 아무리 이기적인 맏이라지만 부끄러울 때가 종종 있다.


둘째가 지역 행사장에서 인사치레로 농산물을 구입해야 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거기서 산 명인이 만든 고추장을 나에게 주었다. 농산물을 팔아주기는 해야 하지만 집에서 밥을 먹을 일이 거의 없는 동생의 농산물은 다른 지인들의 집으로 가는 것이 보통이다. 명인의 고추장을 먹어본 나는 깜짝 놀랄 만큼 맛있다며 열렬한 피드백을 했다. 그에 동생은 명절 선물로 대량 구입해야 하는 품목으로 명인의 고추장을 추천했다. 명인의 고추장은 지역을 대표하는 상품 자격으로 전국으로 보내졌다.


나는 가끔 그 고추장을 볼 때마다 묘한 기분이 든다. 명인은 자신이 고추장을 대량으로 팔 수 있게 된 것이 나의 피드백이었다는 것을 절대 모를 것이다. 나는 아무 힘이 없지만 어쩌다 보니 칭찬 한마디로 명인에게 큰 도움을 준 것이다. 반대로 나는 모르지만 누군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나에게 그렇게 도움을 주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내가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또 큰 상을 받게 되었을 때 모르는 손들이 계속해서 나를 도와주고 있었다. 그걸 단순히 '운'이라는 말로 표현하기에는 좀 부족한 느낌이 든다.


도움은 그렇게 모르는 곳에서도 행해지고 아는 곳에서도 행해진다. 상장 폐지를 위해 공매를 하는 회사의 주식을 사서 수익을 본 셋째가 돈 본김에 남들 다하는 피부과 시술 한번 해보자며 나를 데리고 갔다. 이아루릴 시술 하라며 치료비를 보내준 것도 많은데 피부과에 큰돈을 예치시켜 주는 바람에 엉겁결에 보톡스에 필러에 파워 슈링크, 인모드까지 했다. 방광이 아프고 어지러운 와중에도 예뻐지겠다는 욕망이 대단히 우스꽝스럽게 느껴졌지만 열심히 다녔다. 그리고 별로 예뻐 지지는 못했다.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 울세라급 통증이라는 파워 슈링크를 세 번째 했을 때는 내가 독립운동을 한 것도 아닌데 왜 여기 끌려와서 이런 고통을 겪나 싶었다. )


최근 들어 방광 통증이 오기 전에 강력한 불안이 먼저 온다. 그 불안은 마치 허리가 아프거나 두통이 오는 것처럼 신체적 증상으로 느껴지는 통제 불가의 불안이다. 불안에 휩싸여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경이 되면 다음 순서로 화장실을 자주 가며 방광이 아프기 시작한다. 약사인 올케에게 그 이야기를 하자 기능 의학적 측면에서 혈행의 흐름이 원활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혈부족으로 메마름이 심화되는데 그러면 심장이 빨리 뛰니 불안이 증폭되고 혈관이 수축되어 혈류가 차단되면 방광 온도가 내려가 잡균이 증식해 방광염이 걸리는 것 같다고 했다. 올케가 보내준 철분제를 먹으며 불안이 차츰 가라앉는 것이 느껴진다.


보이지 않는 손은 제치더라도 보이는 곳에서 도움을 주는 것만으로도 차고 넘친다. 최근 들어 감사할 때 나오는 호르몬인 다이놀핀이 엔도르핀의 4,000배 효과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나는 나만 힘든 것 같은 마음에 잠시 감사함을 잊고 살았다. 감사를 잊은 자리에 들어오는 것은 언제나 죽고 싶은 절망감이다. 특히 방광 통증은 스위치를 켜는 것처럼 삶에 의욕을 잃게 만든다. 그런 날 냉장고에서 꺼내든 고추장 단지를 보고 내가 그 명인을 도왔듯 나를 돕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다. 잊어버렸던 감사를 다시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난주 이아루릴 재 시술을 시작했다. 수요일은 오전 수술, 오후 진료인 날인데 내가 오전에 신경과 진료가 있는 것을 알고 수술 전 진료를 봐줬다. 종합병원에서도 단골 대접을 해줬다. 일주일간 정맥으로 항생제를 맞고 방광 상태를 확인한 의사가 시술을 시작하자고 했다. 그 또한 감사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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