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틸 Mar 02. 2023

12. J형이 되고 싶은 P형 인간의 하루

핸드폰 배터리가 빠른 속도로 줄어드는 이유로 지하철 안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천장만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섞여 귀로 들어왔다. 백색소음이랄까. 노곤하게 잠이 쏟아졌다. 그렇게 졸고, 졸다가, 간간히 지난 역들을 확인하고, 또 졸고. 평일 낮에 휴가라는 것은 이런 것이었다.      


나름 휴가계획은 있다.     


1. 집청소를 한다.

2. 그동안 미뤘던 병원투어를 하고, 샌드위치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한다.

3. 홍대입구역에 가서 북카페 한 곳, 독립서점을 방문한다.

4. 책을 2권쯤 사고, 브런치에 글 하나 올린다.

5. 퇴근 시간에 맞춰 글쓰기 모임에 간다.

6. 갤러리 카페에서 모임을 하고, 일본어 공부도 한다.

7. 집에 도착.     


이 정도면 J형 아닌가. 그런데 나는 왜 P형인가.      


계획마다 시간을 정했다면 지금 앉아있는 북카페에 한 시간 전에 도착했을지도 모르겠다. 청소하려다 SNS에 홀려 시간을 한참 흘려보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대충 헤아렸던 시간보다 한 시간이 지나있었다. 설거지는 포기하고 청소기만 후다닥 돌리고서 밖으로 나섰다.      


뭔가 불편하지만 견딜만했던 통증들을 해결하기 위해 병원투어를 시작했다. 예상외로 대기환자들이 많지 않아 진료는 금방 볼 수 있었다. 다만, 뜻밖에 피검사라던가, 항생제 처방에 당황했다. 뭐 또 그렇게 아프진 않는데, 약 두 봉지를 가방에 넣고, 식전 약과 식후 약을 번갈아 먹어야 하는 상황이 좀 난처했다.      


그래도 나는 계획을 세웠으니까, 샌드위치를 먹으러 갔다. 생수가 없었던 가게. 탄산수로 약을 넘기며, 이거 맞아? 싶은 생각과 이대로 집에 다시 들어가 침대에 눕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 올랐다. 하지만 나는 계획형 인간. 물러설 순 없었다. 재료 조합에 실패한 맛대가리 없는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면서 ‘일단 홍대입구 역까지만 가자’ 마음먹었다.      


그리고 졸고, 졸다가, 2번 환승해서 홍대입구 역에 도착했다. 마음의 갈등. 1.1km를 걸어서 독립서점을 먼저 갈 것인가, 역에서 200m 가까이 있는 북카페에 갈 것인가. 그러나 내 다리는 북카페를 향하고 있었다. 역 출구에서 나와 5분 만에 찾은 카페는 무척 한적했다. 내 발걸음 소리가 울릴 정도로 조용했달까. 이제 나는 건강에도 힘쓰리라 마음먹었으므로, 디저트는 시키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버터스콘이 진열대 위에 ‘까꿍’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아메리카노만 마시겠다는 계획은 잠시 보류.   

   

그리고 자리를 잡고 노트북을 펼쳤다. 뭔가 계획대로 움직인 것 같은데, 뭔가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지금쯤이면 책도 좀 읽었어야 했고, 브런치 글도 다 써서 이미 올렸어야 하는데?!

구글에서 ‘일본 롯폰기’ 가 볼 만한 곳을 검색할 때가 아닌데 말이다. 독립서점 가는 길 검색 시뮬레이션을 이렇게 돌릴 일도 아니고.     


그래도 3.5항쯤은 하지 않았더냐. 나머지도 약간씩 디테일은 수정해 가면서 결국엔 하게 될 테니 다 한 것이나 다름없다. 후후. 그런데 왜 MBTI 하면 항상 P형이 높게 나올까. 시간에 크게 연연하지 않아서일까? 계획을 하루 중에 다 한다면 됐지 하면서, 계획은 훅훅 잘 바꿔서 그럴까? 진짜 J형들이 보면 ‘그래서 넌 P형이구나.’ 할지도.


여하튼, 나는 오늘 무척 계획적으로 보내고 있다. 계획대로 착착!!               

작가의 이전글 11. 당신, 지금 좋아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