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1.~11.30 완독책
시와 산책, 한정원, 시간의 흐름
“걷다가 죽어가는 벌레 곁에 있어주고, 창을 내다보는 개에게 인사하고, 고양이의 코딱지를 파주며 탕진하는 시간이 나는 부끄럽지 않다. 그 시간의 나는 진짜 ‘나’와 가장 일치한다.”
회사 정수기 옆 창가에 잠시 서서 카페인 프리 차 한 잔을 들고 멍하게 잠시 서 있고, 딱히 할 말도 없으면서 아이 이름을 불러본다거나, 계단 개수를 세며 올라가고, ‘짱구는 못말려’를 보며 킥킥거린다.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
오레스테이아, 아이스킬로스, 열린책들
“인간이라면 누구도 재난을 겪지 않고 속죄하는 일도 없이 한평생을 살아가지는 못하는 법이지요. 왜냐하면, 아, 고통은 비록 오늘이 아니라도 내일이면 찾아오니까요!”
고대 그리스 때부터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삶의 비극이 진실이었다는 것. 벗어날 수 없는 두려움과 불안은 이런 진실을 몸이 알고 있었다는 걸 대변한다. 잠깐의 기쁨에 오만하지 말자고 다짐한다. 고통은 오늘이 아니라면 내일이라도 온다잖아.
철학책 독서 모임, 박동수, 민음사
“우리를 적대하는 사람도 환대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이 인류 공동체에 속해 있음을 인정하는 행위, 그가 사람으로서 사회 속에 현상하고 있음을 몸짓과 말로써 확인해 주는 행위”
이 책에서 소개된 모든 책을 다 사서 읽어싶다. 철학책 독서 모임이라니. 너무 매력적이잖아. 무엇보다 고전 철학에서 던지는 해묵은 질문 ‘나는 누구인가?’를 넘어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으로 확장해 나가는 방식이 참 좋다. 나를 편안하게 해 주고 싶은 사람들만 만나고, 좋아하고 싶은 마음에서 반대쪽을 굳이 볼 필요 있나 싶은 마음을 부서줘서 고마운 책.
거인의 노트, 김익한, 다산북스
생각과 기록을 통해 기억을 끌어내 현재 상황에 비추어서 편집해야 비로소 지혜가 된다.
뭐랄까. 기록? 이라는 단어에 혹에서, 막냇동생 추천도 있고 해서 충동 구매한 책. 사 놓고 한참 읽지 못했는데, 연말이라 올해는 다이어리를 사야 할까 말까를 고민하다가 생각나 꺼내 읽었다. 다 알고 있어도, 실제로 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당연한 이치를 깨달으며 책을 덮었다. 다이어리 2권 충동구매로 마무리.
첫 책 만드는 법, 김보희, 유유
“세상은 초고를 끝내 본 사람과 아닌 사람으로 나뉩니다.”
밑미 ‘하루 한 줄 문장메모’ 리추얼로 인연을 맺은 희희님의 첫 책, 첫 책 만드는 법. 업무편람처럼 연구하게 읽게 되었다. 첫 책. 단어만 봐도 마음이 설레고 가슴이 두근거린다. 여러 가지 실용팁들을 노트에 옮겨 적다가, 나는 한 번도 초고를 완성해 보지 못한 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좌절.
매일 이곳이 좋아집니다, 마스다 미리, 티라미수 더북
“나는 지금 여기 한 명뿐이다. 지구와 비슷한 별에 나와 쌍을 이루는 생물이 있다 해도 그건 내가 아니니까 나는 지구에 있는 나를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오사카 출신 마스다 미리의 도쿄 적응기. 여름에 다녀온 도쿄가 그리워졌다. 다시 가고 싶다. 혼자 가고 싶다. 무리하지 않고, 조금 노력하는 선에서 도쿄에 나만의 생활 반경을 만들어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대단하지 않은 소소한 일상들이 모여 한 사람의 궤적을 만드는 것 멋진 일이라는 걸 알았다.
상처로 숨 쉬는 법, 김진영, 한겨레출판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너무나 잘 다스리죠. 그러면서 나를 딱딱하게 만들어요. 아무것도 안 느끼게 만드는 거예요. 타자의 고통에 철저하게 무감각하게 만들어요.(중략)우리가 사이코패스적 부드러움을 안 가지면 이 사회에서 살 수가 없어요.”
올해의 도끼책. 아도르노(독일의 철학자)의 철학을 해설하는 강의안. 철학을 ‘슬픈 학문’이라고 불렀다. 상처 받은 삶, 회복될 수 없는 삶 속에서는 아무것도 정상적일 수 없는 것이라고 비통해하는 철학자. 객관적 권력 속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삶이라면 정말 슬프잖아. 그러니 가끔 무용하고 비자본주의적인 것들, 삶의 여백 같은 걸 허락하는 생을 살아가는 용기를 내보자는 결론에 이르렀다는.
삶은 예술로 빛난다, 조원재, 다산북스
“진정 좋은 예술작품이란 무엇일까?
내가 누구인지, 내가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담겨 있는 것. 이 세상에 단 한 가지만 던질 수 있다. 면 내가 던지고 싶은 것은 진정 무엇인지에 대한 진솔한 고민이 담겨 있는 것. 그것을 자기 고유의 개성으로 표현해 낸 것.”
언젠가 술에 잔뜩 취해서 짝궁에게 나는 예술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이 책에서 말하는 게 예술이라면 한 번 도전해볼만 하지 않는가. 비루한 손재주를 가지고 있다고 비관만 할 것이 아니었다.
네덜란드 살인 사건, 조르주 심농, 열린책들
“당신은 이 사건이 일종의 가정 비극임을 어렴풋이 간파하고도, 사건 해결을 기정사실화할 만한 일차적 증거에 무작정 달려들었소. 다름 아닌 외국 선원의 범행으로 말이오!그렇게 하는 것이 어쩌면 공공의 안녕을 위해 더 좋았겠지. 별다른 추문도 없을 테고! 부르주아가 서민에게 좋지 못한 본보기를 보이지 않아도 되고 말이죠!”
순수한 재미로 추리소설을 읽는 것. 범인이 누군지 예측하면서 읽기에 너무 단서를 적게 주는 것이 아니냐며 투덜거리기. 이 당시만 해도 과학수사가 없었으니 형사의 직감은 너무 중요하잖아. 그래도 나름 현장검증도 하고. 그 때도 역시 진실보다는 체면과 명예를 지키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메그레 반장. 다음 권에서 만나요.
11월 소회(所懷)
과학책과 인문사회 계열 책을 거의 못 읽었다.
시집을 읽고 있긴 한데, 진득하게 한 권을 읽지 못하고 여러 권 펼치기만 했다.
저자들의 본 장르 책을 읽어보자.
시인은 시집을, 일러스트는 그의 그림이 담긴 책. 철학자 본인의 글이 담긴 책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