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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 은 Jun 30. 2019

어쩌다 하는 미국 문학기행 1

조지아주 사바나 - 플래너리 오코너(1925-1964)

 조지아 주의 대도시 애틀랜타에는 민영방송국 CNN 본사와 코카콜라 박물관 등 미국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빌딩이 들어서 있다. 애초에 국립철도의 기착지로 세워졌지만 곧 빠르게 성장해서 철도교통의 중심지로 부상했으며 남북전쟁 당시 전소가 되다시피 하지만 전쟁의 상흔을 딛고 재건 과정에서 상업과 교역의 도시로 성장함으로써 ‘신 남부 문화’를 이끈다. 60년대 시민권 운동을 이끈 지도자들을 배출했고 국제공항이 건설되고 1996년 올림픽을 유치하게 되면서 기존의 전형적인 남부의 분위기와는 차별된 문화를 이룩해왔다. 무엇보다 이곳은 유서 깊은 전통이면의 역사적 트라우마가 역동적인 신세대 문화와 어우러져있다. 


     2018년 1월 애틀랜타에서 일주일 남짓 보냈다. 애틀랜타에서 자동차 주행으로 약 두 시간여 걸리는 곳에 있는 작은 대학에 재직 중인 미국 시인을 만날 계획이었다. 그의 시집 두 권을 한국어로 번역한 원고를 들고 동토의 한 공항에서 자정을 넘긴 시간에 시애틀 경유 애틀랜타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조지아 주로 향하면서 내가 꿈꾼 건 미국 남부지역의 따스한 햇살이었다. 플로리다를 비롯한 남부지역은 가을이나 겨울에 방문하는 것이 좋다. 그중 조지아는 아열대의 온난한 기후로 알려져 있다. 


조지아 주에 관해서 내겐 소소한 기억이 하나 있다. 20년 전 처음 미국 생활을 시작하면서 여느 이민자와 마찬가지로 자동차 운전면허 시험을 준비하느라 지역의 운전면허학원에 등록했다. 주행코스를 담당한 백인 남성 강사와 대화를 나누던 중, 그는 기회가 된다면 조지아 주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 당시 미국에 대해 내가 알고 있던 지식은 오직 책과 티브이에서 얻은 것이 전부였다. 나는 그에게 왜 조지아 주냐고 물었다. 그는 간단히 날씨가 좋아서,라고 대답했다. 그때 내가 살던 곳은  일 년에 3분의 일 이상 눈이 오는 뉴욕 주 북서부의 한 도시였다. 그의 대답은 미국 생활 초짜인 내겐 아무런 실체가 없었고 상상할만한 이미지조차 불러내지 못했지만, 나는 조지아, 라는 말을 그 이후로 여러 번 되뇌곤 했다. 그 조지아 주를 20년이 지나 비로소 방문하게 된 것이다. 기대라고 할 건 없었지만, 늘 머리 위에서 얼굴을 내미는 태양이 친절하게 보내 줄 따스한 햇살을 두 볼과 이마에 흠뻑 받고 싶었다. 극지방의 얼음장 같은 대기와 하루 종일 해라곤 딱 두세 시간뿐이고, 게다가 늘 묵직한 잿빛 구름에 가린 겨울 하늘에 갇혀있었으니, 내 소소한 바람을 탓할 순 없으리라.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애초 여행의 목적이었던 시인과 만날 수 없었다. 그의 고향이며 시집에 수록된 시의 정신적 원천이라 할 밀리지빌이라는 작은 도시를 시인과 함께 방문하려고 했지만, 하필이면 그를 만나기로 약속한 바로 그날 조지아 주에는 ‘유례없는’ 눈이 내렸다. 그 전날 오후부터 기온이 떨어지더니 평년 기온을 한참 못 미치는 ‘강추위’ 속에 밤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다음 날 아침엔 고속도로를 비롯해서 지역의 자동차 도로에 눈이 쌓여서 애틀랜타와 인근 지역 교통이 거의 마비되었다. 주지사는 아침 일찍부터  긴급재난상황을 선포했고 방송에선 새벽부터 날씨와 교통상황을 줄기차게 보도했으며 학교는 이미 휴교되었고 되도록 바깥출입을 자제하라는 고지가 반복 송출되었다. 바야흐로 조지아 주의 위급상황이었는데 실제로는 적설량은 일 인치도 안되었고 기온은 화씨로 15도에서 25도 남짓이었다. 폭설로 인한 일상생활의 마비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만큼 추운 곳에서 살아왔던 터라  일인 치도 못 되는 적설량과 화씨 영도 밑으로 내려가지 않는 기온에도 일상이 대혼란을 겪는 그날의 조지아 주가 처음엔 다소 코믹하게 여겨진 것도 사실이었지만, 사시사철 따스한 햇살이 비추는 것이 정상이라고 여겨온 조지아 주의 입장에서는 나름 심각한 재난을 겪고 있었으니, 나는 금세 마음을 수습하고 그들의 ‘위기’를 내 위기로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했다. 

 

  결국 여행 목적이 좌절된 채 터덜터덜 알래스카로 돌아와야 했다.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우리의 삶이 그렇듯 애초의 목적지였던 밀리지빌을 제외하고는 조지아 주에서 제법 많은 것을 보고 왔다. 어쩌다 나는 조지아주 출신의 작가들을 찾아 문학기행을 나선 셈이었다. 

사바나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스패니시 모스

가령 역사의 유령이 마치 그곳의 커다란 참나무 가지에 매달린 스패니시 모스(spanish moss)처럼 어딘가 구석구석에 웅크리고 있을 것 같은 도시 사바나와 그곳에서 반갑게 만난 플래너리 오코너의 유년시절 이야기, 미국의 주요 도시 중 하나로 손꼽히는 애틀랜타의 도심에 멋진 스카이라인을 만들고 있는 현대식 빌딩에 둘러싸인 곳에 동그마니 남아있던 마가렛 미첼의 집. 여기서 미첼의 그 유명한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쓰게 된 경위를 알게 되었고 그녀가 두문불출 소설을 썼던 방과 타이프라이터를 보았다. 


마침 애틀랜타 시내로 나갔던 날이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기념일이어서 예정에도 없이 목격하게 된 그의 생가 앞에 늘어선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행렬. 지역경찰은 킹 주니어의 생가 주변 길을 막고 교통정리를 했고, 긴 줄에 서서 차례를 기다리면서도 싱글벙글 축제에 가는 것 마냥 웃고 있던 흑인들의 얼굴은 인상적이었다. 물론 나는 그 길고 긴 줄에 지레 겁먹어 킹 주니어의 생가를 들어가 보진 못했다. 애초에 구경하려고 길을 나섰던 다운타운에 있는 ‘언더그라운드 애틀랜타’는 보수, 개축 중이어서 방문센터만 둘러보았다. 언더그라운드 애틀랜타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엽까지 전후 복구기에 신 상업도시로 발돋움한 애틀랜타의 기용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곳이다. 대륙 종단 기차의 기착지로 출발해서 거의 모든 기차들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요충지였던 애틀랜타의 도심을 가르는 기차 길 위로 세워진 커다란 고가도로에 번성한 상업 지구였던 이곳은 현재는 주변의 신생 상가들과의 경쟁 속에서 힘겨워 보이지만 신흥도시가 겪어온 역사의 기록을 담고 있다.

플래너리 오코너 유년시절 집

여기까지 쓰고 보니, 내 첫 조지아주 여행은 실패의 연속으로 보이지만, 모든 실패에 담긴 비밀처럼, 실은 나는 애초 계획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었다. 사바나에서 만난 플래너리 오코너는 한국 독자에겐 아직도 낯설지 모르지만 미국의 작가 지망생들에겐 필독서이자 롤 모델이기도 하며, 나 역시 '애정'하는 단편소설 작가이다.  

그녀가 유년시절을 보낸 집을 들어가려면 다소 길고 높은 계단을 올라야 한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작은 도서관과 북 스토어를 겸한 사무실이 보인다. 그리고 다시 실내 층계를 걸어 올라가서 방을 둘러본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마치 오코너의 유년시절로 안내하는 기억의 계단같이 느껴졌다. 계단을 보자마자 휴대폰을 들어 사진을 찍었다. 나는 유독 이 계단이 마음에 들었는데 그 이유는 설명할 수 없지만 아마도 이층 창문에서 들어오는 그 환한 빛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빛이 내리쬐는 계단의 저 끝에 대한 이끌림은 물론 그날 내 마음의 상태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사실 이 계단의 이미지는 내게 익숙한 오코너의 작품세계와 부지불식간 연결시킨 어떤 무의식적 연상일 수 있다. 가령 ‘천국의 계단’이라는 다소 진부하지만 계단이 연상하는 어떤 종교적 이미지 같은 것이다.     

 오코너는 미국 현대작가들 사이에서도 유독 기독교적 주제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오코너는 당시 미국 남부를 지배하고 있던 신교 중심 분위기에서도 매일 가톨릭 미사에 참석했다고 한다. 종교적 신앙심을 기초로 한 도덕적 인식을 통해 현대사회에서 발생하는 폭력과 정신적 혼돈에 대해 엄정한 시각과 풍자적 비판을 견지했던 오코너는 특히 악마가 지배하는 영역에서 홀연히 나타나는 은총과 자비에 관심을 가졌다. 


가령 그녀의 대표작인 단편소설 「선한 사람을 만나기가 어려워」는 허위와 위선을 보이는 노인이 자신의 불찰로 아들의 가족과 자신을 탈옥수의 손에 살해당하도록 몰아가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그리고 있는데, 이 소설의 거의 마지막 장면에 노인이 죽음 바로 직전에 갑작스러운 깨달음의 순간을 경험하고 은총을 행하게 된다.


"그녀[할머니]는 그 남자[탈옥수]가 지껄이는 말을 듣다가 갑자기 머리가 깨끗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남자의 얼굴이 자기 얼굴 가까이에서 일그러져서 마치 울 것처럼 보이자, 너는 내 아이야,라고 말하면서 그의 어깨로 손을 뻗어 어루만진다. 그러자 탈옥수]는 마치 뱀에게 물린 듯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그녀의 가슴을 향해 총을 세 방 쏜다." 


 소위 ‘미국 남부 고딕 문학’으로 알려진 장르의 대표적 작가로 꼽히는 오코너는 특히 단편소설의 대가였는데 그로테스크한 사건과 인물들을 등장시켜 가장 기독교적인 주제를 다룬다. 이 단편소설에서 그 은총의 순간은 읽는 독자의 성향에 따라 무의미할 수도 있지만 종교적인 차원에서는 매우 심오한 순간이라고 오코너는 설명한다. 오코너는 당시 남부 사회에서 소위 남부 지역에 고유한 ‘미스터리와 풍습’이 사라져 가는 세태를 인식하고 그 점을 집중적으로 다루어서 ‘남부 고딕 작가’로 불렸다. 종교적이고 사회적 주제의 진중함에도 불구하고 오코너의 글은 신랄한 유머를 담고 있었고 남부지역의 뿌리 깊고 독특한 이야기 전통을 이어받았다. 그녀의 소설에는 신랄한 풍자와 코믹함이 어우러진 서사적 힘이 남부지역의 오랜 전통과 관습을 배경으로 강렬하게 뿜어져 나온다. 


플래너리 오코너가 유년을 보낸 사바나의 집은 라파이에트 광장 한편에 서 있다. 라파이에트 광장은 자그마한 도시 사바나의 중심에 위치하고 세인트 존 침례교 성당과 오코너의 집 중간쯤에 있다. 오코너의 집에서 창문을 통해서 성당을 볼 수가 있다.

오코너의 집에서 보이는 성당

 분수가 뿜어져 나오고 조지아 주의 특징인 스패니시 모스를 나뭇가지에 축축 늘어뜨린 채 나무들이 들어서 있는 이 광장은 어쩐지 오코너의 유년시절 혹은 그 시대를 그대로 불러오는 풍취가 느껴진다. 그래선지 도시 사바나는 유령 출몰 이야기가 많다. 많은 도시들이 역사를 갖고 있지만 사바나만큼 그 역사를 지우기보다는 그저 품에 안고 있는 도시는 흔치 않다. 광장을 조금 벗어나면 사바나 아트스쿨이 있는 번화가가 나오고 그곳에는 최첨단의 기기를 갖춘 커피전문점과 이런저런 현대적 가게와 물품들이 눈에 띄지만, 그마저도 광장을 둘러싼 오랜 건물들의 풍취에 감싸인 채 언제고 과거의 유령이 불려 나올 것 같다. 

   오코너의 유년 집은 미국에서 몇 안 되는, 대공황 시대의 건축을 복원한 작가의 집 중 하나이며 플래너리의 유년기에 조용하고 평화로웠던 가정생활을 잘 재연해 두었다고 평가받는다. 이곳의 도서관에는 고서가 비치되어있고, 5세였던 오코너가 닭에게 뒤로 걷는 법을 가르쳤다고 알려진 정원도 있다. “5세 때 뒤로 걷는 닭이 있었는데 그래서 뉴스에도 나왔다. 그 일은 내 인생에서 절정이었고, 그 이후 내 인생은 안티 클라이맥스였다.” 5세 이후부터 내리막길이라는 인생은 어떤 것이었을까.

오코너의 어린 시절 사진

  1925년생으로 1964년에 사망하기까지, 40세도 채우지 못하고 죽은 플래너리 오코너는 사바나에서 태어났지만 대부분 (내가 이번 조지아 여행에서 가려고 계획했지만 결국 못 가고 말았던 소도시) 밀리지빌에서 살았고 조지아 주립 여대에서 공부했다. 이어 아이오아 대학에서 1947년 문예창작 석사학위를 받는다. 아이오아 대학에서 로버트 펜 워렌, 존 크로우 랜섬, 로비 마콜리, 오스틴 워렌, 엔드류 라이틀 등 당시 문학연구 분야에서 신비평을 중심으로 문단과 학술계를 이끈 작가와 연구자들을 만나고 그들의 강연을 들었다. 그중 유서 깊은 문예지 ≪스와니 리뷰≫의 편집자였던 앤드류 라이틀은 초기부터 오코너의 소설을 열렬히 지지했다. 나중에 그녀의 글을 출간하기도 했고, 비평도 해주었다. 오코너는 오헨리 상을 세 번 수상했고 사후에 전미도서상을 수상했다. 단편소설 외에도 장편소설도 썼다. 두 편의 장편소설 『과격한 사람들의 차지 The Violent Bear It Away』과 『현명한 혈통 Wise Blood』 은 꽤 유명했고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사적으로는 은둔적이었지만 오코너의 소설은 인간 행동에 담긴 미묘한 의미를 특이하게 포착하고 있다. 그녀는 열성적으로 가톨릭 신학에 관한 책을 모으기도 했고, 신앙심과 문학에 관해 강연하러 건강이 나쁜데도 장거리 순회를 다니기도 했다, 

남부 작가들이 왜 괴짜 등 비정상적인 사람들에게  유독 관심을 기울이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우리가 그런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오코너). 


 1950년에 루푸스 진단을 받게 되는데 이 병은 오코너의 아버지가 앓다가 사망한 불치병이었다. 말년에 10년간 밀리지빌(* 이곳은 내가 가려했지만 가지 못했던 그 도시이며 결국 나는 사바나의 오코너 집에서 이곳의 이름을 다시 조우하게 된다)의 가족농장 안달루시아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글 쓰고 공작새를 기르면서 살았다고 한다. 오코너는 「새들의 왕」이라는 제목의 에세이에서 자신이 길렀던 공작새에 대해서 쓰기도 했다. 


사바나의 오코너 하우스에는 그래서인지 공작새 무늬가 많다. 상점에서도 공작새 무늬로 만든 기념품과 북마크를 팔고 있었고 오코너 하우스에 관한 간단한 설명을 해주었던 근무자의 명함에도 공작새 문양이 들어가 있었다. 오코너 하우스는 봄과 가을에 열리는 일요강좌가 유명해서 작가 마이클 커닝햄과 현재 유명 페미니스트 작가인 록산 게이(*<나쁜 페미니스트>의 저자) 등이 초청되어 강연했다. 2010년에는 이곳이 국제적인 관심을 받기도 했는데 전미 도서 상의 최종 후보 20명을 이곳에서 발표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발표자였던 지금은 작고한, 역시 조지아 주 출신 작가이며 우리에겐 소설 『세월의 왕자』로 알려진 팻 콘로이는 이곳을 “세계문학의 신전 중 하나”라고 부르기도 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콘로이는 오코너를 미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단편소설 작가라고 꼽았다. 투병생활 중 자주 활동을 중단해야 했지만 오코너는 강연과 낭독회를 지속했고 1964년 수술을 받은 후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서 39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여행이란 이런 것일 수도 있다. 적어도 내겐 여행은 정해진 코스를 따라가는 것보다는 대략의 계획은 있으나 언제나 도착한 후의 상황에 따라 정처 없이 발길을 옮기는 궤적이다. 나는 밀리지빌에는 도착하지 못했으나 밀리지빌에서 말년을 보낸 오코너의 자취를 사바나에서 만났다. 사바나는 조지아 주에서도 꼭 가보고 싶은 고장이었다. 그건 미국 문학 작품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는데, 막상 도착한 사바나에서 나를 사로잡은 것은 커다란 참나무들과 나뭇가지에 늘어진 스패니시 모스였으니, 내가 보려고 한 것과 다른 것들, 혹은 그 이상의 것들을 여행은 펼쳐놓는다. 


작가의 집은 직업상 되도록 꼭 들러보려고 노력하지만 막상 가보면 예외 없이 작은 도서관과 북 스토어를 겸한 상점이 있기 마련이고 작가가 지냈던 방에는  진품인지 모조인지 모를 자잘한 소품들이 진열되어있다. 작가의 집에서 그런 것들을 굳이 자세히 볼 필요는 없다. 대신 그 공간을 경험하는 게 더 중요하다. 나는 오코너의 집에서 유년기의 침대와 인형, 동화책과 그림 따위는 건성 지나치고 대신 창문으로 내다보이는 닭을 길렀다는 정원과 나뭇가지 틈새로 보이는 성당의 첨탑과 삐걱거리는 계단과 벽, 복도와 창틀을 꼼꼼히 살폈다. 우리가 작가의 집을 보존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그가 숨 쉬고 살았던 공간을 경험하기 위해서 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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